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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왜, 그렇게 고백하는가? /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9 조회수840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6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또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

 

 요한 드 브레뵈프 성인은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1622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성인은 24년 동안 힘들게 전교하던 가운데 프랑스와 적대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체포되어 동료 8명과 함께 1648년 살해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용기와 성덕으로 말미암아 많은 원주민이 개종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30년 성인 반열에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바오로 성인은 1694년 이탈리아의 제노아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서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군인으로서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전투에 나가기도 한 그는 영적 투쟁에 나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점을 깨닫고 은수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예수 고난회를 설립한 성인은 1775년에 선종하였습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52)

 

 Woe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stopped those trying to 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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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이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율법 학자들의 잘못을 질책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

 

☆☆☆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만큼 그대로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잘못을 아들이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는다고 해서 아들의 이가 시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아버지가 잘못한 것의 책임을 아들에게 전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준엄한 질책을 받게 된 것은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자손들이 반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좋은 전통을, 그리고 선과 기쁨을 대대로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부전자전’이란 말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게 고백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불행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가리아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언자들을 죽인 것은 조상들인데, 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벨의 피는 구약 최초의 살인 사건을 상징하고, 즈가리야의 피는 구약 최후의 살인 사건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피부터 즈가리야의 피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모든 죄를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인데, 왜 직접 그 죄를 짓지 아니한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경우는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왜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그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고 고백할까요?  그분을 못 박은 것은 로마 군인인데, 왜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고 고백할까요?


   이처럼 우리가 직접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 성서는 자꾸 서로의 죄가 무관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시 시대의 사람들에게 과거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말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옛날 지었던 모든 과오들, 모든 죄들이 아직도 자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면서 죄가 죄를 낳게 하는 상황이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가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칠층산”에서 자신의 동생이 2차 세계 대전에서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세상의 악이 결코 자신이 그동안 지었던 죄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깊이 있게 통찰합니다.


   직접 자기가 그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들이 전쟁이라는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상황과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서로의 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세상의 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죄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우리가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고 하는 고백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조금 덜 부렸더라면, 그분은 덜 사무쳤을 것이고, 우리가 조금 더 인내했더라면, 그분은 덜 아프셨을 것이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처럼 우리 역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로 살인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 마음에 못을 박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진리를 멀리하고, 정의를 외면하고, 사랑을 짓밟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셈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 지금 당신을 죽이고 있는 모든 죄, 앞으로 미래에 많은 사람들이 어김없이 반복할 죄, 곧, “세상의 죄”를 아시고, 그 모든 죄들을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의 말씀은 바로 이를 알려주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가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멘.


                     ▒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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