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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3 > 어떤 부자(父子)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9 조회수954 추천수9 반대(0) 신고

                                              

 

 

 

                          어떤 부자(父子)



   휠체어마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베드로 형제가 새벽 일찍 혼자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지는 통에 엉덩이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들 분도가 매일 찾아와서 성화를 대었다.


   ‘아부디, 언데 와?“

   벙어리는 아니지만 분도는 말을 잘 못하며 또 알고 있는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뭣 땜시로 매일 찾아와서 성가시게 구느냐?”

   내심으로는 기특해 하면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바보스러운 아들을 보고 짐짓 한번 소리쳐 본 것이다.


   “아브디(버지)없으니까 혼다(자)무더(서)워서 못 다(자)겠어.”

   나이가 쉰이 다 된 아들이 아버지 없이 혼자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하자 아버지 눈에 금방 이슬이 맺혔다. 가슴을 저미는 아픈 정 때문이다.


   분도는 베드로 형제의 양아들이다. 1949년생이라 나이는 쉰이 다 되었지만 지능과 정신연령은 세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양아버지인 베드로 형제는 올해 일흔 일곱에 앞 못 보는 봉사며 두 다리마저 절각되어 거동이 아주 불편한 분이다. 그런데 두 부자(父子)가 서로 돕고 의지하며 아주 잘살고 있다.


   소록도에 환자수가 5,60천이 넘을 때는 어린 환자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 어린 환자들도 고향에서 부모를 떠나 아예 버려지다시피 된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양부모의 사랑이 아주 필요했으며 사실 좀 괜찮은 아이들은 어른 환자들이 욕심을 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형의 병을 얻어 세상을 골백번 더 포기한 환우들에게는 어린 나환자들이 하나의 희망이었고 또 보람이었다. 그들에게 정을 쏟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어른 환자들은 자신들의 병을 잊었고 또한 삶의 보람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베드로 형제도 12살에 나병을 얻어 14살에 소록도에 입원을 했으니 그동안 소록도에서 산 햇수만도 65년이 된다. 경상도 어느 시골에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어느 날 발목 부근에 반점 같은 것이 생기면서 부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눌러도 아프지가 않았다.


   13살 때는 세수할 때 눈썹이 몽땅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베드로 소년은 동네의 눈총을 받았으며 1년 이상 집 안의 골방에 갇혀 지낼 때 뒷바라지해 주는 형수가 많은 고생을 했다. 이때 베드로 소년은 병에서 오는 아픔과, 그리고 친구들과 격리된 외로움에서 오는 충격 때문에 집안 식구들과 자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베드로 소년은 관에 신고 되어 트럭에 실려 갔으며 나중엔 부산에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소록도에 입원하는데 그때 함께 입원한 환자들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소년 베드로를 전송하면서 그랬단다.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 그리고 네 아비가 아니다.”


   그 후로 베드로 소년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으며 가족과의 연락도 일체 없었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길을 혼자서 터득해 나갔다. 대개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이 살아야 할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베드로 소년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눈치껏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보통학교에서 공부를 아주 잘했고 또 말도 잘 들어서 병원 직원들 분만 아니라 주위 여러 어른들로부터 귀염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렸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린 환자들을 양자로 삼아 그들을 보살펴 주곤 했지만 그러나 자식농사는 좋지 못했다.


   그는 여러 양자를 기르면서 위로보다는 고통을 더 겪었다. 첫 번째 아들이 일찍 마약에 빠져 결국 자살했는가 하면 두 번째 양자도 행실이 좋지 못하다가 일찍 병사했고, 세 번째도 병사 했으며 네 번째는 여식이었는데 처녀 때 행방불명이 된 채 지금껏 소식을 모르고 있다. 아마 그들 모두가 일찍 병을 얻은 충격 때문이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베드로 형제를 비난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발도 없고 손도 없는 어른이 아이들을 이용해 먹는다는 것 이었다. 그래서 베드로 형제가 마음으로 입은 상처도 컸었다. 그는 부모와 형제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결국 자신도 자신이 길러 준 양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내 사는 대로만 살겠다고 다짐했으나,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지옥이었다. 바로 그때 나타난 것이 ‘분도’였다. 분도는 나병에다가 말도 그저 “어,어” 밖에 못 하는 일종의 벙어리였으며 지능은 아주 낮은데 그때 당시의 나이는 서른이 넘었었다.


   젊은 환자가 있으면 어른 환자들은 눈독을 들였지만 그러나 분도의 경우는 달랐다.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분도 본인도 이것을 아는지 어떤 때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산에 들어가 먹지도 않고 혼자 지내기도 했는데 부락 사무실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보호자를 찾은 것이 결국 베드로였다.


   그러나 본인 자신은 이제 눈도 멀고 할멈도 없는데다가 손발이 성치 못한 불구의 몸으로 도저히 분도를 키울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주위에서 베드로 영감만이 분도를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하여 나중에는 흔쾌히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이래서 분도가 베드로 형제의 다섯 번째 양자가 되었다.


   베드로 씨는 남의 아이들을 키워 봤기 때문에 사람 다루는 기술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분도의 그 쓰레기 같은 소지품들을 다 태워 버리고 일체 새 것으로 바꿔 주었으며 ‘바보도 사람이다’는 인격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 못하는 그를 달래고 어르고 하면서 사람 노릇을 하게 만들었다.


   분도는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이 뭘 갖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볼 줄도 모르면서 시계 차는 것을 원했으며 들을 줄도 모르면서 카세트 녹음기를 졸라 댔고 자전거를 원해서 자전거를 사 주기도 했는데 시계는 여전히 볼 줄 모르지만 다른 것들은 제법 듣고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베드로 형제가 참 사랑을 쏟자 분도 쪽에서도 참 사랑이 솟구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소중한 줄을 깨닫게 되어 말도 제법 배우고 사람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베드로 형제의 손발과 눈이 되어 하나부터 열까지 지성으로 아버지를 받드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분도가 모자라기는 하지만 심성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파서 미사에 못 나오면 자기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한테 와서 아버지가 아프다고 일러준다. 산에서 밤을 주워 아버지께 드리기도 하며 아버지 잡수시라고 졸라 댈 때는 눈물을 자아내기도 한다.


   사람 같지 않다고 양자 삼기를 거절하고 누구도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바로 그 분도가 양아버지를 잘 섬기는 모습을 보자 주위에서 또 말들이 생기게 되었다. ‘영감이 바보 피를 빨아 먹는다 ’느니, ‘베드로 형제가 분도를 묶어 놓고 구박을 한다’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분도는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주위에서도 분도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베드로 형제가 이미 노쇠한데다가 몸이 좋지 않으니 그분이 돌아가시면 서로 분도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선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을 이쪽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투자(?)를 해야 한다. 미국사람들이 한참 한국 고아들을 자신들의 아기로 입양 시킬 때 잘나고 똑똑한 아이를 고른 것이 아니라 약하고 병든 아이들을 선호 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감동을 주는 일이다.


   세상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작은 자를 큰 사람으로 보는 눈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베드로와 분도의 부자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소록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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