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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한 잎 낙엽에 부쳐 / 낙엽 따라 걷는 길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24 조회수528 추천수6 반대(0) 신고

 

어제 오늘 갑자기 가을이 성큼 다가온듯 썰렁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군요.

2003년도 11월에 저희 본당 게시판에 올렸던 (낙엽)이란 글을 다시 올리며 그때의 회상에 잠겨 봅니다.

 

   < 낙엽 >

성당을 오갈때마다 학교 담을 끼고  지나게 되는 길바닥에 어느날 부터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수북히 쌓였는데, 청소하는 분들이 일부러 쓸지 않은건지 아니면 계속 떨어져 그런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보기에는 너무도 좋았습니다.

 

바람불고 빗발이 치던 날, 지붕위에 소복하게 노란 은행잎을 이고 달려가는 승용차의 모습도 퍽 이채로웠습니다. 담의 기둥 위에도 돌의자 위에도 온통 은행잎 잔치였는데 한겨울 장독대에 소복히 쌓인 함박눈처럼 낭만적이고 풍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브 몽땅)의 오텀리브스(autumn  leaves)가 생각나기도 하고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이 생각나기도 하는 계절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차중락의 사망소식을 뉴스에서 전해들으며 가슴이 철렁하도록 안타까웠던 기억도.....

차중락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거든요.

 

2년전의 가을에 예고없는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찾아왔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슬픈 감정이, 강물처럼 차 올랐던 슬픔이 잔잔하게 가라앉아 이제 노란 은행잎이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치유된것 같기도...

그 가을 겨울 내내 빛바랜 은행잎을 밟으며 오가는 길은 너무도 썰렁하고 허하기만 했었는데 이제 신앙에 의지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면서 그때의 악몽이 사라지는걸 느낍니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나에겐 너무 커다란 힘으로 의식을 지배한 것 같습니다.

대여섯살때로 기억되는데 할머니가 나비 만지지 마라, 나비가루 눈에 들어가면 눈 먼다 하고 주의 주신 말씀이 오래도록 나로 하여금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경직되게 했습니다.

 

그때 시골엔  나비가 유난히 많았죠. 노랑나비 흰나비, 감자꽃에 장다리꽃에 완두콩밭에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가 정말 예쁘다고 느끼기도 전에 나는 눈먼다는 그 말이 너무 무서워 나비만 보면 멀리 몸을 피했습니다.

그것은 성장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메마르게 했고 대신에 책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건 아닌지, 십대시절 난 지독한 독서광이었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운 기억은 많아도 실생활에선 별로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2년전의 그 악몽은 나에게 감성을 살아나게 하는 촉매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많아지고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풍요롭게 했고 신앙심을 깊게 만들었으니 나쁜 기억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졌다고나 할까요.

 

낙엽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 은행잎이 노란색이어서 그럴거예요.

유치원 꼬마들 노란옷 노란모자 노란가방을 멘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릅니다. 누가 말하길 노란옷을 즐겨입는 사람은 남의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에 과시욕이 있다고 했지만, 어린 아이들에겐 노란색보다 더 예쁜색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병아리처럼......

 

12월이 되면 이 노란색 은행잎도 허옇게 빛이 바래겠지요!

그럴지라도 금년 겨울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렵니다.

가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하는 소월의 시 한귀절처럼 두툼하게 쌓인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덕수궁 돌담길은 아니라도 이 낙엽의 향연을 조용히 음미하며 올 한 해를 마감하렵니다.

                       (2003년 11월 14일)

 

이 글을 처음 본당 게시판에 쓴  때가 2003년 11월이었습니다.

1년 후 가을에 굿뉴스 <따뜻한 이야기>방에 다시 올렸었지요.

오늘 전원 신부님의 낙엽에 부치는 글을 올리면서 다시 한 번 리바이벌(?) 합니다.

 

자신은 무척 이성적이고 낙천적이고 감정의 절제를 잘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이 의외로  감성적인 성격이란걸 깨달았던 것도 새삼 기억나는군요.

이성적일 때 신앙을 받아들이기 무척 힘들었었다는 것도, 감성적이 되었을 때 비로소  메마른 대지에 촉촉히 봄비가 스며들듯이 신앙이 내마음에 찾아왔다는 것도 회상이 됩니다. 올 가을 겨울에도 아마 나는 노란 은행잎을 밟고 성당을 오가며 회상에 잠길 겁니다.

가슴 아릿한 회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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