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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분열의 기준은 무엇인가?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26 조회수682 추천수3 반대(0) 신고

 

 

<분열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1)



  예수님께서 말하신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을 자칫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화해와 헷갈려하는 것 때문입니다.

  화해와 용서, 평화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면서 어떻게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고 양쪽을 화해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양립할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룩하시고자 하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은 화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답니다. 알버트 노울런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들 갈등하고 있는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 서로 터놓고 말하여 오해를 없앨 수 있게 해 준다면 갈등이 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도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위의 말이 적용될 경우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다툼에 한정될 뿐입니다. 모든 갈등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럿이서 힘과 불의로 억누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럴 때는 정의와 불의를 화해시킬 것이 아니라 악과 불의와 죄를 단연코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실제로 온전한 중립을 지키기 어려우며, 억눌리는 자 편에 서서 그들을 돕지 않으면 실제로는 억누르는 자를 돕게 되는 겁니다. 현상유지라 해도 억눌리는 자 편에서 보면 나아진 게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은연중에 긴장과 갈등이 불의나 억압보다 더 나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와 희망이 부족한 모습일 뿐이며 현장에서 도망치려는 심정을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은 권력자들에게서만 배척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로마 권력을 뒤엎으려는 열혈당원들에게서도 소극적 배신자라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극우파나 극좌파 모두에게서 예수님의 죽음이 환영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라빠라는 반란자가 대신 풀려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과의 화해와 영원한 평화이겠지만 그 첫 번째 효과는 분열과 갈등이었습니다.


  결단을 내리라는 요구는 모든 악의 세력과 분열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 기준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합법적인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제한 한다면 불의한 일이라고 항거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합니다.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새로이 획득한 힘을 남용하거나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만 유혹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무시하고 빵으로 상징되는 인간적인 가치에 복종하기를 권유받았습니다. 일의 효율을 위해 권력을 거머쥐고 한꺼번에 통치하려드는 세력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들에게서 칭송받는 명예를 선택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치를 무시하려드는 세력과 분열해야 되는 기준이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싸워 오신 유혹에서 이겨내신 것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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