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열심히 기도하던 한 사제가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 놀라 죽었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타성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이 우화를 읽은 후 과연 내 소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기도 제목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소원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선뜻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나의 바람으로 울창한 숲을 나와 숲 전체를 한눈에 보았더니 내 소원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좀 힘이 들더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이 소원을 분명하게 붙잡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지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라는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건만 우리는 벳자타 못가의 38년 된 병자처럼 병이 낫고 싶은 진짜 소원은 접어두고 물이 움직일 때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만 탓하며 안타깝게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인터넷 뉴스를 통해 텔레비전 드라마 중견작가인 조소혜씨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암 말기로 사망하기 전 그녀는 “나에게는 간암 말기 선고를 듣는 것보다 저조한 시청률에 대한 이야기가 더 괴로웠다”고 했답니다. 도대체 그녀가 말하는 그 ‘시청률’이 무엇이기에 자신의 몸을 죽이고 있는 암보다 더 힘들었을까요? 그녀는 ‘암’ 이전에 그 ‘시청률’에 매여 이미 죽은 것입니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중견작가인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했다면 자신이 잡고 있는 그 ‘시청률’이라는 줄을 놓을 줄 알아야 했습니다. 조소혜씨뿐만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부터 늘어나고 줄어드는 신자들 때문에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니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것이며, 우리 목숨까지도 이 땅에서 사용하고 나면 그분께 도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최명숙 목사(군산 베데스다 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