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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29 조회수581 추천수2 반대(0) 신고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외쳤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 10,46-51)


  언젠가 어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산에 올라가 돌을 던지면 김, 이, 박 씨 중에 한 사람이 맞는다고 했는데, 요즘엔 달라 남산에서 돌멩이 던지면 아마 교회 첨탑에 걸린 십자가 네온사인 등이 깨질 걸!” 그 친구의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나라꼴이 왜 요 모양 요 꼴이냐는 자조 섞인 말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 커지니 가난한 사람과 노숙자는 더 생기고 병으로 고통당해도 치료비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도 여전하다는 말입니다. 부정부패는 나아질 기미가 없고 교인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소외 받고 가난한 이웃을 도우려할 때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에게 질문하신 의도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질문을 굳이 왜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항상 제 묵상 과제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연히 다 아실 텐데 왜 질문하셨을까?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그랬을까? 겸손해 지라고? 자신을 살펴보라고? 많은 의문이 생겼지만, 이것이다! 라는 감동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고 물으신 것은 실제 네게 필요한 것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선을 베푼다.”고 표현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다.” 라는 의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선은 그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꼭 필요한 것, 그가 절실히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남아도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을 덜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니고 있든 없던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려는 자세가 바로 예수님의 자세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자선을 시혜를 베푸는 것쯤으로 여겼습니다. 베풂으로서 선행을 실천하고 자신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시혜를 베푸는 자와 굽신거려야 하는 자로 나누었습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너희 포도를 남김없이 따 들여서는 안 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9.10)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신명 26,10)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말하는 것은 아예 소출의 일부, 그중에서 제일 좋은 몫을 하느님의 몫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저렇게 요량할 생각을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께서 그 제물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지만 특별히 더 큰 사랑으로 보살펴 주어야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 18) 예수님의 사명은 그들이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존엄성의 회복입니다. 가난과 배고픔, 소외와 병고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에서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던져주기보다 따뜻한 눈인사와 악수가 더 큰 축복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소경 바르티메오를 눈 뜨게 만드는 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제도와 시설을 개선해야 합니다. 또 가능하다면 개안 수술을 받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기쁨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10,36절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적어 놓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러나 그들의 요구에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그림자를 살펴보라는 요구입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살펴보는데 선천적 맹인이었다고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바르티매오처럼 눈이 열리는 치유를 받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눈이 열려 예수님을 따른 자는 눈멀었던 바르티매오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그분께서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가를 보지 못하는데서 온다.” - 성 아빌라의 데레사





Mozart Symphony NO. 25  제 1 악장 : Allgro con b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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