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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0 >백일반지와 지네 ㅣ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2 조회수842 추천수5 반대(0) 신고

                              

 

 

                         백일반지와 지네

                              


  백일반지


   나는 일 주일 중 목요일을 은근히 기다리는 편이다. 그 날은 저녁 미사가 없어서 오후시간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저녁식사는 으레 외국 수녀님 댁에 가서 양식으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모든 수녀님들이 그렇지만 이 분들도 남에게 대접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는 분들이라 소록도의 외국 수녀님 댁은 연중 외부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수녀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여러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사실 재미있고 또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순수한 간호사로서 30년 이상 봉사해 오셨기 때문에 어떤 원장은 무슨 일을 하셨고 도 어떤 환자는 어디가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 훤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통 요리를 매주에 한 번씩 맛을 본다는 것도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다. 수녀님들은 스파게티와 피자를 잘 만드시는데 아무리 절제를 하려고 해도 목요일 저녁만은 늘 과식하게 된다. 그래도 그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기만 하다.


   지난 5월에는 나에게 외지의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목요일 저녁식사를 초대받기가 힘든 때도 생겼는데 그런 경우는 수요일로 앞당기거나 아니면 금요일로 미뤄서 초대를 해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은 내가 출장을 가지도 않는데 굳이 수요일에 앞당겨서 하자는 제의를 해 오셨다. 이를테면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달력을 보니 그 날은 5월 14일, 바로 석가탄신일이었다.


   ‘석가 탄신과 신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 날 저녁 수녀원에 들어서자 외국 수녀님들이 유난히 반가워 하시며 한술 더 떠서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하시는데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리고 식탁에 앉고 보니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곽이 하나 놓여 있었고 눈치를 보며 슬쩍 뚜껑을 열었더니 금으로 된 가는 반지하나가 스펀지에 꽂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짐짓 놀라는 눈짓을 보내자 수녀님들이 손뼉을 치며 “오늘은 신부님의 백 일 날이니 백일반지를 끼워야 지요” 하는 것이었다. ‘백일’이라니....  내가 당최 뭔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지자 그분들이 설명을 했다. 이를테면 내가 소록도에 부임한 지 그 날이 꼭 백 일이 되는 날이라는 것인데 나는 내 생애에 그런 축하는 처음 받아 봤다.


   날짜를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대단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미사 때 환우들에게 반지 낀 손을 번쩍 들어 자랑을 했더니 모두가 웃으면서 기뻐했다. 아마 전에 누군가가 수녀님들한테 선물을 했던 모양인데 이유야 어떻든 내게 ‘백일반지’라는 이름으로 소록도의 생활을 축하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본래 나는 몸에 뭘 치장하는 편은 아니다. 말하자면 아침에 면도 하고서도 그 흔한 로션 한 번 찍어 바르지 않는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부 될 때 고모님이 해 주신 옷 한 벌을 가지고 4계절을 입은 것이 18년도 넘는다. 생긴 것이 없어서 스스로 길들여진 습성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자유로울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금반지의 경우는 다르다. 그것이 비록 반 돈의 무게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진 사랑과 신뢰의 무게는 천 근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의 어떤 형제가 “신부님도 금반지 끼십니까?”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이 백일 반지를 무덤 속에 까지 소중하게 가지고 갈 것이다.

   (반지는 IMF 금 모으기 운동할 때 나라에 바쳤다.)



   지네와의 전쟁


   섬 지방에는 대체로 지네와 뱀이 많은 편이다. 소록도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사제관과 수녀원은 건물들이 낡아서 그놈의 짐승(?)들이 수도 없이 기어 나오기 때문에 질겁할 때가 자주 있다. 밥을 먹다가도 발가락을 물릴 때가 있으며 이불을 들추다가 요 위에서 기어 나오는 지네를 잡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 지네 노이로제에 안 걸릴 수가 없다.


   사실 지네란 놈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혐오감을 주는 징그러운 벌레다. 그것이 몸 전체를 흔들면서 기어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그리고 이놈은 어찌나 질기고 끈덕진지 이놈을 잡아 실로 묶어 돌에 매달아 놔도 열흘이 넘어도 죽지 않으며 때려도 잘 죽지 않는다.


   그런데 묘한 것은 지네를 한 마리 잡으면 또 한 마리가 그 부근 어디에서 다시 나온다. 이를테면 부부(?)인 모양인데 그래서 지네를 한 마리 잡게 되면 다른 한 마리 마저 잡을 때까지 마음을 영 놓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꿈속에서까지 지네가 꿈틀거려 잠을 자면서도 질겁할 때가 자주 있다.


   지난 여름의 일이다. 서울에서 자매님 두 분이 오시어 손님방을 청소하는데 지네치고는 아주 큰 놈이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고 있던 슬리퍼로 사정없이 때리고 두들겨서 잡기는 잡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언제 또 다른 한 놈이 기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자 손님들에게 미리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손님을 맞고 나서 나는 걱정을 많이 했다. 분명히 또 한 마리가 어디서 기어 나올 텐데 그놈이 언제 나오느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얘기를 듣기로는 지네가 ‘에프킬러’에 약하다는 정보에 따라 방 구석구석마다, 그리고 천장 쪽에도 주의 깊게 약을 뿌린 뒤에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손님 중에 한 분은 나보다 나이가 적은 내 고모였고 다른 한 분은 그녀의 대녀였다. 그 날은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며 먼저 오신 병원 수사님과 함께 맥주를 마셨는데, 얘기가 시시콜콜한 내용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삶의 막힌 것을 뚫어 주고 또 기운을 북돋우는 치료제요 진통제였다. 특히 수사님은 대화에서 사람을 은근히 사로잡는 기술이 있었다.

   우리는 새벽 한 시에 이르러서야 얘기를 끝내고 각자의 방에 가서 쉬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참 곤하게 자는 새벽 두 시경에 어디서 비명을 크게 지르며 난리를 피우는데 분명히 그놈(?)이었다. 그래서 자다 말고 뛰어가 파리채로 때려서 잡기는 했는데 글쎄 이놈이 고모의 어깨로부터 목으로 기어올랐다는 것이다.


   이튿날은 그래서 지네 때문에 화제가 더 풍성하게 되었다. 특히 수사님이 얻어 들은 풍월로는, 지네가 닭과 상극이어서 닭은 지네만 보면 쪼아 먹고 지네는 닭 뼈를 좋아하기 때문에 닭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어 두면 지네들이 거기에 몰려서 결국은 단지에 갇힌 지내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수사님의 말씀은 그 신분에서 오는 품위와 함께 큰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 날 점심은 삼계탕으로 준비했으며 여섯 마리나 되는 닭의 뼈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작은 항아리 네 개에 담아 지네가 나올 만한 집 둘레에 파고 묻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기대를 걸면서 결과를 확인은 못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볼일이 있어서 외지에 출장을 갔는데 출장 중에도 내내 단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지네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나름대로의 멋진 복수에 통쾌감도 있었으며 또한 이젠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잠을 잘 생각을 하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오산도 아주 큰 오산이었다.


   나흘 만에 소록도로 돌아와서도 결과를 바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완전을 기하기 위해 사흘을 더 기다린 뒤에 이제는 집 안의 지네들이 몽땅 갇혀 있을 것이라는 쾌재를 부르며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었더니 글쎄, 지네는 한 마리도 없고 단지마다 구더기만 잔뜩 들끓고 있는데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또 ‘아차‘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사실 지네와 닭이 서로 상극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수사님의 말씀이 백 번 옳을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고야 그렇게 근엄하게 농담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속았다는 생각도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와 수사님은 어쩌면 지네와 닭처럼 상극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젠 ‘지네’하면 그 흉물스런 짐승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한여름의 닭 뼈 단지 사건과 산 도둑처럼 생긴 털보 수사님이 재미있는 모습으로 클로즈업된다. 지네도 결국 살자는 것인데 어떻게 서로 편하게 공생할 수는  없을까.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소록도 본당 주임)

 

           
                            홀로 피는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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