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3 조회수78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11월 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Who among you, if your son or ox falls into a cistern,
would not immediately pull him out on the sabbath day?”

(Lk 14.5)

 

제1독서 필리피서 1,1-11

 

복음 루카 14,1-6

 

요즘 많이 날씨가 쌀쌀합니다. 낮에는 느끼기 힘들지만, 새벽에는 기온의 변화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지요. 기도하러 경당에 들어갈 때, 방에서 입고 있는 복장을 그대로 하면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항상 두꺼운 옷을 하나 더 걸치고 경당에 들어간답니다. 그런데 문득 경당의 기온이 궁금했습니다. 경당 안의 온도가 도대체 몇 도 길래 이렇게 추위를 느끼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거든요.

17도. 경당 안의 온도계가 가리키고 있는 온도입니다. 분명히 여름의 기온보다는 낮은 기온이지요. 하지만 한 겨울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기온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당의 온도가 한 겨울에는 영하로도 떨어지거든요. 따라서 봄이 오면서 경당 안의 온도가 10도만 넘어도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17도가 된다면? 그때는 더운 날씨죠.

똑같은 17도입니다. 봄에 느끼는 17도와 가을에 느끼는 17도의 차이는 왜 이렇게 다를까요? 즉, 봄의 17도는 더운 반면, 가을의 17도는 왜 춥다고 느낄까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런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똑같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견디기 힘든 시간으로 여기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오히려 은총과 감사의 순간으로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름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계시고 안계시고의 차이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항상 가까이 다가오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처럼 어떤 날에만 가까이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멀리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만 보아도 알 수가 있지요. 사람들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치료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치료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당신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사람들 곁을 떠나야 한다면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것이지요.

우리들의 고통과 시련을 느끼는 그 차이는 바로 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결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느끼고, 당신께서 함께 했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괜한 분에게 원망을 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왜 나를 이렇게 각박하고 험한 세상에 그냥 내치시냐고……. 정말로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나의 이 고통과 시련을 제발 좀 없애달라고…….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내게 있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기심으로 인해서 주님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주님의 자리를 내 안에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고통과 시련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게 할 안식일 치유도 거침없이 행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배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주님과 진정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경험해도 감사와 기쁨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멋진 하루를 만들어 봅시다.



일본판 쉰들러('좋은 글' 중에서)



1940년 여름,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오자 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피난해 왔다. 이미 리투아니아의 각국 영사관에도 퇴거명령이 나와 있었다. 유태인들은 다시 여기서부터 다른 나라로 탈출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비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영사관이이었다. 절망적인 그들에게는 그곳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본국 외무성 장관 앞으로 암호전보를 쳤다. 그러나 장관으로부터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말라는 답신이 왔다. 독일과 협정을 맺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측 비위를 건드릴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탄원의 전보를 쳤다. 회신은 같았다. 겁에 질린 채 영사관앞에서 서성거리는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이틀밤을 고민했다. 그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저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며 본국 훈령을 거역하고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를 퇴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식사도 걸러가며, 유태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는 6천명의 유태인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스기하라는 당연히 외무성에 복직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에게 사직을 요구했다.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스라엘은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덕분으로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뉴욕에서 감사의 모임도 가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거리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1986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채 세상을 떴다. 많은 유태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가 자신의 조국에서 명예를 회복한 것은 세상을 떠난 지 7-8년이 지나서였다.

 

“Is it lawful to cure on the sabbath or not?”

(Lk 14.3)

 

 

 


Please Don't Go - And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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