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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1)신부가 뭘 알겠어요 / 정광호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3 조회수989 추천수5 반대(0) 신고

 

 

 

 

                <신부가 뭘 알겠어요>

 

                                              글쓴이 : 미국 버팔로 한인성당 :정광호 신부님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루카 11,27)

 

자신보다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영광이라 나 같으면 더욱 기뻤을 것 같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어머니가 아니라 젊은 아들을 향한 칭송이다.

눈앞에 서있는 젊은이의 잘난 모습을 보고 그런 아들을 낳고 길렀던 어머니의 보람을 여인의 참 행복으로 돌린 것이다.

그럼 이 칭송을 들은 그 젊은이는 과연 얼마나 기뻐했을까 마냥 궁금하기만 하다.

 

"야, 우리 신부님 참 좋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 속담에 '칭찬하는 이를 친구로 삼지 마라.' 는 말이 있지만,

당장 달착지근한 이 좋은 느낌을 어쩌랴!

 

평생 이런 만족스런 느낌으로 신부를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그 느낌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곧이어 다른 소리도 들려오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우리 아기는 안아 주지 않아."

"신부님은 있는 사람들하고만 잘 지내셔."

"아직 젊으니까 학생들에게만 신경을 쓰시지."

"신부님은 저만 야단쳐요."

"신부님은 남의 얘기만 듣는 것 같아."

 

이런 말을 들으면 가끔은 화들짝 놀라게도 되고 외로워지기도 한다.

물론 모두 다 틀린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저마다 색안경을 쓰고 자기 얘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디에서도, 잠시도 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소리들이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좋든 싫든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신부의 삶이 아니던가.

 

버팔로에서의 지난 10년간의 본당신부생활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 중에 혹 어떤 이들은 아주 개인적으로 가까이 오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종교적으로만 접근할 뿐 그밖에는 상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을 정당화 하기 위해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이 오려고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미안한 것은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더라는 것이다.

애써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싶었고, 나는 개인 누구의 신부가 아니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아무도 내 편으로 삼지 않았기에 모든 이들에게서 멀어지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잡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편하고 싶어서였을까?

정이 없어서였을까?

 

"엄마, 무슨 기대를 하세요? 신부님들이 고생 한번 제대로 해 보셨나요, 사람들의 사는 아픔을 느끼시나요? 그저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아무 어려움 없이 하시기만 할 뿐이잖아요?"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낙태를 한 어떤 자매님이 본당신부에게 야단맞더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니에게 중학생 나이의 한 아이가 한 말이었다.

'위로는 고생해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덧 말에 가서는 가슴이 저렸다.

 

나도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 좋은 게 좋다고 항상 같이 서서 같은 입장의 이야기만 들려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한 적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의 얘기를 전할 것인가.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것이 사제의 직분이다.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있다면 어쩌면 그들에게 유리한 얘기를 함께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와의 만남이 아니라 이웃과의 그저 그런 만남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을 향한 칭송에 답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인상 깊다.

루카는 그 분의 감정적인 면은 비추어주지 않고 간단한 대답만을 들려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만들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자신이 보내어진 목적이신 그분께로 올려 보내는 것,

그것이 그분의 대답이고 자세였다.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즉 자신과 의견이 같은,

또는 같아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도우는 그 분은 참 지도자셨다.

 

우리는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내 편으로 만들고,

사람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는 실수를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서로의 잘남과 못남,

있음과 없음,

옳음과 그름으로 서로 서로가 밀려나고 갈라지기보다는

그 사이에 함께 할 때에만 정작 우리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을

만날 것이다.

 

              출처 : 가톨릭 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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