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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5일 야곱의 우물- 마르 12,28ㄱㄷ-34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4 조회수938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ㄱㄷ-34)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요약하고 완성하는 계명이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나는 지금 이탈리아 로마에 와 있다. 신학생 때 이곳에서 4년간 유학생활을 했고, 8년이 지난 지금 재충전이라는 명목하에 다시 이곳에 왔다. 예전에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는 말씀을 벽에 써붙여 놓고 살았다. 여러모로 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그 말씀은 내 삶에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씀 대신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께 분부하신 대로 다 하십시오”(창세 31,16)라는 말씀을 써붙였다. 학위에 욕심 부리지 말고, 지식 쌓는 데 몰두하지도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그분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자는 뜻에서다. 그런데 신학생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며칠 지나지 않아서부터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알고 있는 것과 마음에 품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할 때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제대로 배우면 알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진다. 단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배운다면 말이다.” 오늘 복음에도 이 충고를 들어야 할 사람이 등장한다. 예수께 ‘첫째가는 계명’을 물어온 어느 율법학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율법학자라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마르 12,28)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알고 외적으로 실천한 계명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머리와 마음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만족시킬 만한 가르침을 예수께 듣고 싶어한다. 곧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고 싶어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모든 계명을 함축하는 첫째가는 계명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신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ㄹ).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유와 뜻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는 무엇보다도 유일신 사상이 부각되어 있다. 곧 우리가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하느님은 여럿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리를, 곧 실제 삶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데 소홀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라는 존재 전체를 통해, ‘내 삶’과 관련된 모든 환경에서, 이론뿐 아니라 실천으로도 ‘첫째가는 계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는 계명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느님은 매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응답을 주시는 분도 아니고,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때그때 짚어주는 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피부로 느끼는 것처럼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예수님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둘째가는 계명을 제시해 주신다. 사실 순서상 첫째와 둘째일 뿐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이며 가장 ‘큰 계명’(마르 12,31)이다. 특히 이웃 사랑은 모든 계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가 전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마태 25,31-­46)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의 기준은 이유나 조건 없이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이다. 또한 이것은 주님을 사랑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이웃 사랑의 방법은 ‘너 자신처럼’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웃은 ‘또 다른 나 자신’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에는 이를 분명하게 풀이해 놓은 말씀이 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루카 6,31 참조).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탄복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고백한다(마르 12,32-­33).

 

예수께서는 그가 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고 하신다. 곧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율법학자는 하느님 나라 가까이 다가온 상태라고 하신다. 아직 그에게 실천 단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옮긴다면, 그때 가서는 “너는 이제 하느님 나라에 들어왔다”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삶에서 실천해야 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은 우리한테도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생각하고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완성하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묵상과 기도
▷ 나는 하느님을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가?
▷ 이웃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주님, 입으로만 당신 사랑에 앞장서 온 저희를 자비로이 용서하시고, 저희의 부족한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알고 믿는 바를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또한 이웃에게서 당신을 발견하고 이웃을 통해 당신과 함께하는 은총도 허락하소서.

김정훈 신부(전주교구·로마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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