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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1 > 어떤 꿈과 현실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6 조회수1,449 추천수16 반대(0) 신고

                                              

 

                           어떤 꿈과 현실

 

                           

   꿈과 현실이란 참으로 묘한 관계가 있다. 어느 땐 그것이 투명하게 보여서 인생길을 별 어려움 없이 쉽게 걸어가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땐 그것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마치 미로처럼 헤메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되 꿈과 현실이 결코 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집안의 빚을 갚아야 하는 어려운 사정 때문에 사범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었는데, 선생을 하면서도 나는 교직에서의 대부분을 섬마을에서 근무하며 젊음을 불태우곤 했었다. 그때의 섬마을은 좌천지였다. 그러나 나는 좌천지를 오히려 좋아했다.


   후미진 곳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아니면 부모나 우리조상 누군가가 유전자를 통해서 심어 준 씨앗이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어떤 섭리의 계획이었다. 좌우간, 나는 남들이 잘 걷기 싫어하는 길을 애써 즐겁게 걸으려는 이상한 취향이 있었다. 사범학교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봄방학 때(그때는 3월 말이었다) 친구랑 함께 어떤 시골 산을 넘어가는데 그때 저쪽 어딘가의 토굴 앞에서 문둥이 아저씨 한 분이 옷을 벗고 이를 잡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친구는 ‘에이, 재수 없다’ 며 침을 뱉고 돌아섰지만 나는 왠지 그 정경이 이상한 감동으로 스쳐 오면서 야릇한 동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일종의 ‘만남’ 이었다.


   그 후로 나는 토굴 앞의 노인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전에는 ‘산에 가면 문둥이들이 어린이의 간을 빼먹기 위해 숨어 있다’ 는 말을 간혹 듣기는 했지만, 왠지 이를 잡던 그 노인의 모습이 장차 내가 걸어가게 될 어떤 수도자의 모습처럼 보여져 장래의 포부를 얘기할 땐 엉뚱하게도 바로 그런 삶의 미래를 펼쳐 보곤 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런일이 있었다.


   바로 그 친구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자기 여동생을 나와 어떻게 연결시켜 보려고 만나서 술만 마셨다 하면 은근히 혼사 문제를 꺼내 놓곤 했었다. 얼굴도 예쁘고 사람이 좋아 주위에서도 권했지만 그러나 나는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억울하게(?) 여기던 터라 결혼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번은 그가 그이야기를 꺼낼 때 내가 솔직하게 ‘문둥이 사건’ 의 얘기를 상기시키면서 내 미래는 아마 그쪽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그 친구는 버럭 화를 내면서 “그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는 하질 말거라!” 하면서 대화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정말 진실한 꿈과 소망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꿈은 어디가지나 꿈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늘 먼 거리에서 나를 몰고 가는데 그래도 그 어딘가에는 이상한 연결이 있었다. 나는 섬마을 선생 후에 강원도에서 광부 생활을 제법 여러 달 했으며, 그리고 정말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결국은 그곳도 나와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리저리 방황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이 서른넷에 신학대학에 들어간 나는 불혹이라는 사십에 신부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가는 성당마다 거기에 나환자 정착마을이 있어서 그때마다 쉽게 그들과 잘 어울리며 지낼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인연이라는 것인지. 참으로 묘한 일이요 고마운 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첫 부임지에는 백 세대가 넘는 큰 정착마을이 있었다. 한데 내가 자주 마을을 방문하자 그쪽 성당의 회장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자주 오시면 곤란하다”라는 말을 아주 정중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본당신부가 자기들을 자주 찾아 주는 것을 꽤나 좋아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는 그랬다. 내가 갈 때마다,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에게 따로 일당을 주고, 그리고 반찬 준비도 별도로 장을 봐서 해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교회의 재정으로는 너무도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회장에게 그랬다.


   “앞으로는 교회에서 내 식사를 걱정하지 말고 준비도하지도 말라. 나는 그냥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그들이 먹는 대로 얻어 먹을 테니 그 순서만 정해 주면 좋겠다” 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동네에서 야단들이 났는데 그들에게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실천했다.


   나는 그래서 첫 본당에 4년 반 머무는 동안 정착마을에 있는 나환우들의 집을 모두 네 번 이상 돌아가며 먹고 마셨는데 동네는 그때마다 늘 잔칫날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신부님과 함께 먹는다는 기쁨에 아무리 말려도 집집마다 돈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차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성당을 옮길 때마다 나는 나환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의왕시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몇 달 머물 때에는 환우들의 공동식당에서 나오는 밥을 함께 먹기도 했는데 그때 수녀님들과 다른사람들도 나의 행동을 보고 모두 놀랐다. 그리고 그런 인연으로 전국의 가톨릭 나환우들에게 성령 세미나 지도를 한동안 하기도 했었다.


   몇 해 전이었다. 소록도 성당에는 본래 외국 신부님들이 나환자들을 위해 근 사십 년 동안 계속 이어서 거주해 오셨는데 이제는 한국 신부가 그 일을 하자고 위에 건의한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신부들에게 일종의 자존심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 놓은 터전에 우리가 불쑥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이었다!(1996) 이제는 외국 신부님들이 소록도에서 자진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이때다 싶어 교구장이신 대주교님께 선착순으로 지원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 주셨다. 그래서 올 2월 5일에 한국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소록도 신부로 부임했는데 생각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섬에 들어오던 날, 대주교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섬에 오래 있진 말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시다. 나는 이제 소록도에서 은퇴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다가 그들의 납골당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결국 소록도에 들어오기 위해 그처럼 멀고도 복잡한 길을 걸어 왔던 것이다.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소록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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