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자기의 장애를 사랑하게 된 이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6 조회수563 추천수5 반대(0) 신고

 

 

<자기의 장애를 사랑하게 된 이>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가 14,14)


  우리는 자기 자식을 키울 때도 교육에 관해서는 우리가 들이는 공만큼 성적이 오르지 못하면 섭섭해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화풀이 합니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눌 때도 기대한 만큼 되돌아오지 않으면 상처를 받고 토라집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서로 기대한 만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야만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끝장이 납니다. 그것도 뒷말이 무성한 채로.


  그런데 봉사를 가보면 전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 봉사를 나가면 환자들 목욕을 시키거나 식사 봉사하는 것이 힘만 듭니다. 제대로 응해 주지도 않고 경계하는 모습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들과 정이 들고 이해가 될 무렵부터는 오히려 봉사 나갔던 내가 얻어 가지고 오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작은 도움에도 진정 감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보답을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누런 종이에 곱게 말려진 낙엽이라도 떨리는 손으로 전해 줍니다. 봉사자님을 위해 기도했어요라는 말 한마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금세 알아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 (탈출 4,11)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2.3.)


  이 두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의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불구와 장애마저도 주님께서 쓰시고자 의도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어느 중증 지체장애인이 쓴 글을 읽어 보려합니다.


  장애! 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생긴 피할 수 없는 저주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요,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신 축복의 사건이다. 고통스럽지만, 축복의 증거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느님이 주신 장애! 나는 이를 사랑한다.


  내가 늘 함께 하는 정신지체인, 자폐인 등의 발달장애인들. 나와 같이 지팡이에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이동할 수 있는 중증 지체장애인,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 소리를 만들 수 없는 언어장애인. 이러저러한 장애를 함께 지니고 있는 뇌병변장애인.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을 하여 장애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놀라운 능력의 통찰력이 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므로 이미 고통의 깊은 의미를 통찰한 사람이 바로 장애인이다.

  발달 장애인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 “무소유(無所有),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세계는 산에서 도를 닦는다 해도 얻을 수 없는 삶의 경지이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은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지체장애인으로 하여금 세상이 얼마나 편리해졌는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등 일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방식을 개발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지금이 컴퓨터를 누가 사용하고 있는가?


  최근에 고용촉진을 통한 양극화 해소(兩極化 解消)가 주된 이슈이다. 자세히 보라. 장애인 분야가 사회의 주된 문제가 되고, 정책방향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분야에서 직장을 갖게 되었는지를. 장애인 분야는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분야가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실업자를 근로자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장애인만을 취업하게 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을 고용의 현장으로 이끌어낸 분야가 장애인 복지, 재활분야이다. 이 땅의 가장 많은 고용률을 증진시킨 것이 장애인 분야이다. 가장 생산적인 분야가 바로 장애인 분야이다.


  장애인을 언제까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으려면, 장애를 그저 고통이라 바라보지 말고  장애(長愛)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장애를 그저 좋게만 바라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다. 장애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것임을 사회 현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증거가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하느님은 장애를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장애인을 멀리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다. 장애인이 있는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장애인이 있는 그곳에서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장애인을 통해서 주어진 축복들이다.


  장애! 이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만든 축복의 통로이다. 하느님은 축복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장애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장애를 고통스럽지만, 불편하지만, 사랑한다.


  이 글을 통해서 성숙한 이 분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 분과 같은 의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이 거의 모든 장애인들의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하면서 얻어진 생생한 육성이겠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이분의 성함만 압니다. 더 이상은 알고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인 누구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의 영적 스승이라는 말을 덧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질병과 장애를 씨앗처럼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암이나 사고로 장애를 겪는 분도 있겠죠. 그러나 그 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느 카페에서 따온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모두 정상인인데 태어난 두 아이들이 선천성 농아입니다. 도저히 발견하지 못하는 유전적 질환이 원인이라는 것만 알았죠.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고난으로 해서 주님을 떠나는 우를 범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식구들과 자주 만나고 식사를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얼마나 두 부부가 바쁘게 사는 줄 모릅니다. 아이들을 특수학교에 데리고 다녀야 하므로 개인 생활은 거의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거창한 초대가 아니라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고 밥 먹으며 애들끼리 놀아주게 하고 우리는 그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면 되었습니다. 굳이 위로하려 들지 않아도 우리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  기도 열심히 하고 삽니다. 성당이야 가끔 빼먹죠. 다른 봉사는 생각도 못하죠. 그저 주님을 원망 않고 살아가는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내게는 고통만 있습니다.


                                             - 프랜시스 잠


  내게는 고통만 있습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고통은 내게 충실했었고, 지금 또한 충실합니다.

  어찌 고통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내 가슴이, 심장 아래가 뜨끔거리며 아플 때면

  고통은 언제나 내 곁에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고통이여, 나는 끝내 너를 존경하게 되었구나.

  너는 절대로 내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알게 되었다.  너는 아름다운 것이다.

  너는 연민에 잠긴 내 마음 속에서

  결코 떠나가지 않았던 사람들을 닮았구나.


  고통이여, 

  너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보다 정이 많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죽음의 자리에 드는 날

  오오 고통이여, 너는 자리 속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내 마음에 더 깊이 들어오기 위하여.......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