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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녁 노을 / 최원현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07 조회수619 추천수6 반대(0) 신고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노을은 참으로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놀라움이기도 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홍시 빛, 그래 분명 홍시 빛이었다. 헌데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번쩍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는데,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셨다. 그런데 갑자기 신내가 코를 찌른다. 제 빛깔조차 잃어버린 것 같은 물체, 그것은 정말 대단히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만한 큰 감을 딸 수가 없을 텐데 누군가 귀한 것이라며 갖다드렸던 모양이다. 할머니께선 큰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손자를 떠올리고는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 .


그런데 하필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게 된 것이 마냥 안타까워 그걸 보여라도 줘야겠다며 다음 해 내려갈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덕지덕지 붙은 채 먹을 수 없게 된 감, 그러나 손자에게 주고자 하셨던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왔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봤던 어떤 감 맛보다도 달았다. 역겨운 신내까지도 할머니의 사랑 맛이 되어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처럼 전해져 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할머니의 사랑으로 자라온 나, 나를 향한 그런 할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 것이며, 또 얼마나 큰 것인가.


떠나오던 날, 할머니를 뒤로하고 밤차를 타기 위해 해거름녘에 집을 나섰다. 저만치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홍시 빛이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져 분홍빛 진액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가 서산마루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자 노을을 길게 깔아 놓은 채,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돌아봤더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들릴 리도 없겠지만 목소리마저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을 되풀이하며 할머니가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구 뛰었다.


그런데 30년 전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이제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이시던 순리를 벌써부터 내가 받아들이고 있었음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저녁노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삶,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따라온다.

가는 것, 그래 삶은 가는 거다. 그러나 어디로 얼마큼이나 더 갈 수 있을까. 그날 보았던 할머니의 노을은 스무 해나 더 걸려 있었다. 내 노을은 또 얼마나 더 걸려있을 것인가. 그래, 삶은 인생의 노을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일 게다. 해서 할머닌 어서 가라고 하셨나 보다.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더 서두르라는 것인가 보다.


아파트 단지 앞 나무 위에서 때늦은 매미 한 마리가 섧히 섧히 울고 있다. 생의 노을은 저런 미물에게도 어김없이 오고 말 것 아닌가. 시간을 아끼라는 것, 할머니의 노을이 이미 내 노을이 되어 있는 지금,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내 인생의 노을을 보고 있었음이 아닌가.

 

                                      

                                         <최원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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