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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리한 대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0 조회수613 추천수6 반대(0) 신고
 

 

루가: 16, 1-8

전형적인 한 사기꾼을 칭찬하고 있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전략은 성공한 것이다.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일을 비유로 선택하여

어렵게 느껴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일부러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나

예상치 못한 결말을 보여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의문을 갖게 하면서

그 비유나 우화가 진정 무엇을 말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신다.

 

오늘 복음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하는 집사에게 해고 통지를 한다.


집사는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성실히 일할 능력은 없고, 빌어먹자니 체면은 있고...
궁여지책으로 나온 대책은 주인에게 장부를 돌려주기 전에

조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자에게 빚을 지고 있던 채무자들을 불러다가

자기 마음대로 인심을 쓰면서 빚을 감해준다. 
자기가 실직되었을 때 혜택을 준 사람들을 찾아가자는 속셈에서다. 

언제 어디서고, 이런 사람들은 흔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부분이다.
그 불의한 집사가 일을 영리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주인이 정신이 나갔을까?

더구나 우리는 이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그러니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위기에 빠졌을 때 복음의 집사처럼 사기라도 치라는 말씀인가?
세상을 약삭빠르게 눈속임이나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인가? 

이렇게 이상한 말씀을 하는 의도는

그 구절을 다시 곰곰히 음미하라는 뜻이라 했다.

 

그렇다.

여기서 칭찬받고 있는 점은 분명 그 일 자체가 아니다.

 

집사를 칭찬했다고 해서 불의한 일이 의로운 일로 둔갑하지는 않음은

예수님께서도 명백히 그를 불의하다고 정의함으로써 복음서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음 구절에서도 그 집사는 분명 '빛의 자녀'가 아닌

'세속의 자녀'라고 확실하게 구별하시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부도덕한 행실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그의 무엇을 칭찬하신 것일까?

 

위기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비를 민첩하게 추진하고 있는 그의 태도를 칭찬하고 계신 것이다. 

 

이 집사에게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도 위기에 대처하는 이런 신속함과 민첩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어떤 위기인가?
실직하는 위기다. 

지상에서의 영원한 실직.

즉 이 세상의 임무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되는 마지막 날이 다가온다는 위기이다.

 

세상살이를 결산한 날은 반드시 온다.

그 마지막 날을 과연 우리는 의식하고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여유만만하고

나에게는 닥쳐오지 않을 것처럼 느긋하게 굴지는 않느냐는 물으심이다.

 

그 마지막 날을 위하여 과연 이 집사만큼 민첩하게 대비하고 있느냐는 물으심이다.

또한 그 날을 위해 과연 올바른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대비책이란

재산도 아니고, 보험도 아니고, 후손도 아니고

바로 마지막 날의 심판정에서 자신을 옹호해줄 친구들을 만들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동호회의 친구들이 아니라

자기의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선행으로써 맺어진 친구들을 말한다.

그들은 마지막 결산의 날에 주님 앞에서 변호인단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지막 돌아가야 할 곳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는 곳!

그렇기에 가진 것을 다 털어 변호인단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그것이야말로 가장 영리한 일이라는 말씀이다.

 

늘 알고 있으면서도 내 일이 아닌 듯 잊어버리기 쉬운 말씀을

쇼크 요법을 써서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 주님의 의중을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며 지내는 위령성월을 살면서도 못 알아들어서야 되겠는가.

 

.................................... 

 

2000년 11월 10일, - 생사를 가르는 큰 수술 후, 한달 쯤 되던 날- 쓴 위의 글을

그로부터 6년 후, 다시 읽어보며 느끼는 것.

 

 

세속에도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영원한 그 날에 대한  대비책 하나도 올바르게 마련하지 못하고서

여전히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된 사람인가?

 

"영리하겠다"

시아버님이 나를 보고 처음 하셨다는 말씀.

 

좋은 뜻도 들어있고

약간의 걱정도 들어있는

긍정과 부정의 뉘앙스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말이다.

 

 

그 후로, 수십년.

요즈음 집을 팔고 사고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실수 연발의 헤프닝

 

세속에서 언제 이렇게 뚝 떨어져 살았던지

어수룩하다못해, 챙피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적 무능.

 

도저히 혼자 보내지 못하겠다며 동행을 자처한 자매가

바보같은 행동을 보다 못해 옆에서 하는 말이

'오로지 하느님 일만 머리에 꽉차 있으시니까 당연하다'고.

 

듣기 좋으라고, 위로 삼아하는 친절한 말도

왠지 비웃음 같이 들리는 건 분명 자격지심일거다

 

 

민첩하고 영리한 대책은 커녕

이제부터라도 이렇게 바보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결심과 다짐을 거듭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나이가 몇살인데 현실적인 일에 이렇게 무지하고 대처가 서투른가.

계산도 어둡고, 한번 들어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법적 용어들.

부끄럽고 한심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세속에 초연한 도인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 일만 파고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복음의 근본 내용은 어쩌든지 말든지

그가 불의를 저질렀든지 의로웠든지 간에

예수님께 칭찬받는 약은 청지기의 현실적 대응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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