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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32주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1 조회수667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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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가난한 과부 (마르 12, 38-44)


오늘 복음은 율사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기다란 예복을 입고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들이 보도록 겉꾸며서 길게 기도합니다. 한 마디로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자기 재물을 늘리는 유대교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 있는 남편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과부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시기에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대우받아야 하고 자기가 많이 가져야 합니다. 율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그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행동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과부는 받을 존경도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한 사람 잘되기 위해 허세를 부리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그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자기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 마지막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떤 청산을 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에 하느님은 현재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은 자비하고 관대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다는 오늘 과부의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하라는 뜻으로 왜곡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며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관대한 그 마음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테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테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기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다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자기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1,27)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小人)이 됩니다. 대의(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의 기득권에만 골몰합니다.

돈과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은 자유를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그런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로 참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 간음하다 잡혔다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그를 돌로 치려합니다. 무자비한 그들의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는 사랑과 관대함이 하느님의 진리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아 진리를 배우겠다는 우리들 신앙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진리이며, 하느님이 이 세상의 자비와 사랑의 기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살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치고 죄인이라고 소외된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모두를 살리는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종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대의로 삼아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믿어서 자기 한 사람 성공하고 출세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내세를 보장 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소인배의 마음가짐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찾아 배우며 사는 하느님 자녀의 삶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을 자기 삶의 대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하는 자유로운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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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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