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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일 복음묵상] ‘과부열전(列傳)’ ? / 이기락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2 조회수670 추천수7 반대(0) 신고

                                      

 

                                       ‘과부열전(列傳)’ ?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한 폭의 프레스코(fresco) 그림이 떠오릅니다. 프레스코 화법은 벽이나 천정에 칠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수채(水彩)로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려져서 색도 흐려지고 그림 윤곽도 잘 보이지 않고 남은 것은 시간에 마모된 흔적들. 그럼에도 그 그림 속 풍경이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과 추억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마르코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그렇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절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임금(기원전 871-852년경)이 다스리던 때이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앞에서 가뭄을 장엄하게 선포한 엘리야는 시돈의 사렙타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지요. 사렙타(현재 레바논)에서 어떤 과부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조금으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 합니다.


   과부와 그 과부의 아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방인이었던 엘리야 예언자. 한 끼 식사로는 너무나 빈약한 밀가루 한 줌으로 구워낸 빵. 이런 광경들이 인물 표정도 잘 나타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스코 화(畵)를 보는 듯합니다. 화려한 유화도, 사실적인 그림도, 추상화도 아닌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흙반죽이 마르기 전 붓이나 끌로 거칠게 그려 넣은 그림들이라 할까요.


   고개 숙인 채 사렙타 과부가 서있고 먼저 구워진 작은 빵 하나를 들고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겠지요. 그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실 때까지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단지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병.


   어찌 보면 엄청난 기적이 성경에서는 화려한 수식과 장식을 다 떼어낸 한 폭의 프레스코 그림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엘리야의 가장 모진 원수와 같았던 이제벨 왕비의 고향인 이방인 마을의 과부 하나에까지 하느님의 돌보심과 자비가 미친다는 의미를 더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마르코 복음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가난한, 아주 가난한 어떤 과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함에 동전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렙톤 두 닢 - 지금 우리 돈으로 200원이나 될까. 그런 돈을 넣으면서 자랑스럽고 당당할리는 없겠지요. 본인에게는 그것이 가진 돈 전부이지만 남이 볼까 조심스러워 과부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동전을 넣고 있습니다. 렙톤 두 닢은 하루 생활비라기보다는 그야말로 한 끼,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이겠지요.


   그렇다면 사렙타 과부의 밀가루 한 줌과 같습니다. 그 돈을 말없이 넣고 있는 과부와 그 과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바쳤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해석만을 강조한다면 복음의 참된 핵심을 비켜간 것이겠지요.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응답하는 사렙다 과부처럼(1열왕 17,5)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루살렘 과부의 마음과 그 마음을 말없이 받아주시는 예수님.


   생각해보면 지극히 높으신 분께 인간 세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분께 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겠지요. 또 그 마음이 담긴 어떤 것들이겠지요. 가톨릭성가 221장에 소개된 성 이냐시오의 기도처럼 “내게 주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또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겠지요. 그야말로 당신께는 지극히 하찮은 것들을 주님께서는 기꺼이 또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사렙타 마을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장면들을 마치 한 폭의 프레스코 화(畵)처럼 저는 서서 오래도록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의 율법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과는 확연하게 다른 단순한 이 그림을 보다 보니 마치 제가 그림 속에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 그림들 한 쪽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을까요. 아니면 그림 속의 여백으로라도 남아있을까요. 어떤 모습이든 주님의 눈길이 머무시는 작은 흔적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최민순, 『두메꽃』에서)


● 이기락 타대오 신부·가톨릭교리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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