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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2 조회수917 추천수8 반대(0) 신고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


 

 

근대조각(近代彫刻)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지는 로댕(Auguste Rodin)은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파리에서 하급관리(下級官吏)의 아들로 출생(出生)하였습니다.

 

14세 때 국립미술전문학교(國立美術專門學校)에 입학(入學), 조각가(彫刻家)로서의

 

기초(基礎)를 닦았습니다. 1861년에 아버지가 퇴직(退職)하였기 때문에 생활비(生活

 

費)를 벌기 위하여 건축장식(建築裝飾) 직공(職工) 등 부업(副業)을 하면서 야간작업

 

(夜間作業)에 몰두(沒頭)하였습니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망가진 사나이

 

>를 출품(出品)했으나 너무 생생한 사실적(寫實的)인 묘사(描寫)가 심사위원(審査

 

委員)들에게 거부감(拒否感)을 주어 낙선(落選)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各地)를 여행(旅行)하며 예술방면(藝術方面)의 견문(見聞)을 넓히고 돌아와

 

1878년, 그 작품(作品)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迫進感)으로 인하여 로뎅 예술(藝術)의

 

출발점(出發點)이며 사실적 표현(表現)의 완성(完成)이라 할 수 있는 걸작(傑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 하여 호평(好評)과 함께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그 작품은 국가(國家)에서 매입(買入)하였습니다. 그의 조각은 이 때부터 <청동시대

 

>의 사실적 표현(表現)에 만족(滿足)하지 않고 내면적(內面的)인 깊이가 가미(加味)

 

된 생명력(生命力) 넘치는 표현(表現)으로 바뀌기 시작(始作)했습니다. 이러한 사상

 

(思想) 속에서 그의 명성(名聲)의 중핵(中核)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作品),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발자크 상(像)> <칼레의 시민>등을 통해

 

다채(多彩)롭고 정력적(精力的)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추구(追求)한 웅대(雄

 

大)한 예술성(藝術性)과 기량(技倆)은 오랫동안 건축(建築)의 장식물(裝飾物)에

 

지나지 않던 조각(彫刻)에 예술(藝術)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附與)하고 생명(生

 

命)과 감정(感情)을 불어넣어 근대조각(近代彫刻)의 전개(展開)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로댕의 수 많은 걸작품(傑作品) 중에서도 <칼레의 시민>은 높은 사회

 

적 신분(社會的 身分)에 상응(相應)하는 도덕적 의무(道德的 義務)와 솔선수범(率先

 

垂範)하는 정신(精神)을 일컬으는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장 잘 표현(表現)한 걸작(傑作)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884년 로뎅은 프랑스

 

북부(北部) 항구도시(港口都市)인 칼레 市의 시장(市長)으로부터 1347년 영국(英國)

 

과의 백년전쟁(百年戰爭) 중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시 전체(全體)가 포위(包

 

圍)되었을 때, 시민대표(市民代表) 6명이 칼레 市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絞首刑)

 

을 각오(覺悟)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出頭)한 영웅적

 

(英雄的) 행동(行動)을 기리는 기념상(記念像) <칼레의 시민> 제작(製作)을 의뢰

 

(依賴) 받았습니다. 로댕은 이 작품을 완성(完成)하기 위하여 10년이란 세월(歲月)에

 

걸쳐 심혈(心血)을 기울였습니다. 칼레 시민(市民)들은 영웅적인 선조(先祖)들을

 

아름답게 미화(美化)하여 굳센 영웅상(英雄像)으로 표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작품은 사람들이 기대(期待)한 것과 같은 애국적(愛國的)인 늠름

 

(凜凜)한 모습(模襲)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표현된 6인의 인물(人物)은 칼레 市

 

함락(陷落)에 대한 공포(恐怖)와 개인적(個人的)인 딜레마에 고민(苦悶)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孤獨)하게 고립(孤立)되어 있어, 영웅이라기 보다는 극히 평범

 

(平凡)한 인간적(人間的)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6명의 군상

 

(群像)은 전체적(全體的)인 통일(統一) 가운데 정(靜)과 동(動)의 요소(要素)가 교묘

 

(巧妙)하게 교차(交叉)되어 각 개인의 표현이 평등(平等)하게 중요시(重要視)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댕은 파격적(破格的)인 발상(發想)으로 인물

 

들을 흩어지게 배열(配列)했으며 개성(個性)과 고뇌(苦惱)를 각자(各自)의 생생한

 

표정(表情) 속에 불어 넣었습니다. 이는 로댕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한 발상과

 

예술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네이버 백과 로댕, 백년전쟁, 칼레의 시민, 노블리스 오블리제 등을 보고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끝 -

 

 

 

 

 


이강길
August Rodin
 
 
신의 손 - 로댕의 조각 작품

Rodin, The Thinker 


Rodin

 
Rodin, The Kiss A   

 
Rodin, The Kiss  B  

 
Rodin, Thought


Rodin, The Burgher of Calais


Rodin, Iris, The Messenger of the Gods


Rodin  Heroic bust Victor Hugo

 
Rodin, The Gates of Hell  


Rodin, The View of fugit Amor on the Gates of Hell


 Rodin, The Gates of Hell


Rodin, The View of fugit Amor on the Gates of Hell


Stanford Gallery A


Stanford Gallery B

Stanford Gallery C
 

Stanford Gallery D
Rodin, Danaid circa

Rodin, Young Woman in a Floral Hat


Rodin, Eternal Idol


Rodin, Secret [Hands]


Rodin, The hand of God


 Rodin, The Hand of God

 
Rodin, The Hand of God
 

Rodin, Hand of Devil

 
Rodin Hand Comming Out Thumb


 Rodin, Christ and Mary Magdalen - 1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


 

근대조각(近代彫刻)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지는 로댕(Auguste Rodin)은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관리(下級官吏)의 아들로 출생(出生)하였습니다. 14세 때 국립미술전문학교(國立美術專門學校)에 입학(入學), 조각가(彫刻家)로서의 기초(基礎)를 닦았습니다. 1861년에 아버지가 퇴직(退職)하였기 때문에 생활비(生活費)를 벌기 위하여 건축장식(建築裝飾) 직공(職工) 등 부업(副業)을 하면서 야간작업(夜間作業)에 몰두(沒頭)하였습니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망가진 사나이>를 출품(出品)했으나 너무 생생한 사실적(寫實的)인 묘사(描寫)가 심사위원(審査委員)들에게 거부감(拒否感)을 주어 낙선(落選)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各地)를 여행(旅行)하며 예술방면(藝術方面)의 견문(見聞)을 넓히고 돌아와 1878년, 그 작품(作品)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迫進感)으로 인하여 로뎅 예술(藝術)의 출발점(出發點)이며 사실적 표현(表現)의 완성(完成)이라 할 수 있는 걸작(傑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 하여 호평(好評)과 함께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그 작품은 국가(國家)에매입(買入)하였습니다. 그의 조각은 이 때부터 <청동시대>의 사실적 표현(表現)에 만족(滿足)하지 않고 내면적(內面的)인 깊이가 가미(加味)된 생명력(生命力) 넘치는 표현(表現)으로 바뀌기 시작(始作)했습니다. 이러한 사상(思想) 속에서 그의 명성(名聲)의 중핵(中核)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作品),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발자크 상(像)> <칼레의 시민>등을 통해 다채(多彩)롭고 정력적(精力的)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추구(追求)한 웅대(雄大)한 예술성(藝術性)과 기량(技倆)은 오랫동안 건축(建築)의 장식물(裝飾物)에 지나지 않던 조각(彫刻)에 예술(藝術)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附與)하고 생명(生命)과 감정(感情)을 불어넣어 근대조각(近代彫刻)의 전개(展開)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로댕의 수 많은 걸작품(傑作品) 중에서도 <칼레의 시민>은 높은 사회적 신분(社會的 身分)에 상응(相應)하는 도덕적 의무(道德的 義務)와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정신(精神)을

일컬으는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가장 잘 표현(表現)한 걸작(傑作)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884년 로뎅은 프랑스 북부(北部) 항구도시(港口都市)인 칼레 市의 시장(市長)으로부터 1347년 영국(英國)과의 백년전쟁(百年戰爭) 중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시 전체(全體)가 포위(包圍)되었을 때, 시민대표(市民代表) 6명이 칼레 市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絞首刑)을 각오(覺悟)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出頭)한 영웅적(英雄的) 행동(行動)을 기리는 기념상(記念像) <칼레의 시민> 제작(製作)을 의뢰(依賴) 받았습니다. 로댕은 이 작품을 완성(完成)하기 위하여 10년이란 세월(歲月)에 걸쳐 심혈(心血)을 기울였습니다. 칼레 시민(市民)들은 영웅적인 선조(先祖)들을 아름답게 미화(美化)하여 굳센 영웅상(英雄像)으로 표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작품은 사람들이 기대(期待)한 것과 같은 애국적(愛國的)인 늠름(凜凜)한 모습(模襲)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표현된 6인의 인물(人物)은 칼레 市 함락(陷落)에 대한 공포(恐怖)와 개인적(個人的)인 딜레마에 고민(苦悶)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孤獨)하게 고립(孤立)되어 있어, 영웅이라기 보다는 극히 평범(平凡)한 인간적(人間的)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6명의 군상(群像)은 전체적(全體的)인 통일(統一) 가운데 정(靜)과 동(動)의 요소(要素)가 교묘(巧妙)하게 교차(交叉)되어 각 개인의 표현이 평등(平等)하게 중요시(重要視)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댕은 파격적(破格的)인 발상(發想)으로 인물들을 흩어지게 배열(配列)했으며 개성(個性)과 고뇌(苦惱)를 각자(各自)의 생생한 표정(表情) 속에 불어 넣었습니다.

이는 로댕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한 발상과 예술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네이버 백과 로댕, 백년전쟁, 칼레의 시민, 노블리스 오블리제 등을 보고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배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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