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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3 > ‘ 두려움’이라는 은총 l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3 조회수96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두려움’이라는 은총



   언젠가 서울의 모 성당에서 강론을 끝냈을 때의 일이다. 웬 자매가 슬그머니 나에게 접근하더니 안수 좀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까, 아프지는 않은데 마음이 무척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눈에는 정말 겁이 잔뜩 들어 있었으며 얼굴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하느님의 은총이 두려움으로 온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를테면, 은총(하느님의 선물)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에게 접근할 때는 항상 이쪽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자매가 갑자기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신의 은총 앞에는 인간이 결국 자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또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인 것이다. 신앙을 모르는 이들은 자신이 넘어질 때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절규하지만, 사실은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은혜를 만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다섯에 기름진 고향을 버리고 사막의 척박한 땅으로 이주한 것도 두려움이었으며, 모세가 오합지졸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도 두려움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도 두려움이었으며 바오로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때도 역시 두려움이었다. 한마디로 두려움이 없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리아의 생애도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오로지 두려움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집도 안간 처녀로서 아이를 임신한 것도 두려움이었으며 핏덩이를 안고 이집트로 피난을 간 것도 두려움이었고 그리고 일찍 과부가 되고 하나있는 자식을 잃은 것도 역시 두려움이었다.


   이런 것을 바라 볼 때, 은혜와 축복의 길은 두려움을 거치지 않고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부한다.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떨 구는 데에는 사실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성서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바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이 바람에 흔들린다는 것은 성령의 기운이 찾아온다는 것인데, 이때 돛을 바람방향으로 올리고 키를 잘 잡고 있으면 배가 아주 빠른 속도로 전진하게 된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고 “나 죽겠다!” 하며 나자빠진다면 배는 결국 물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그 자체는 사실 기분 좋은 것이 아니며 대단히 혐오스럽고 재미없는 것이다. 자존심도 많이 상하며 체면도 이만저만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두려움이 큰 은혜가 되는데, 여기서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만 그렇다는 것이지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히려 큰 불행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있었던 어떤 한인교포의 얘기다.

   이 사람이 처음엔 큰 꿈을 가지고 재산을 다 정리하여 이민을 갔으나  이것저것 손대는 것마다 다 실패하고 결국은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수중에는 겨우 70불만 남게 되었다. 이제는 타국만리 에서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가 엉겁결에 찾아간 곳이 바로 성당이었다.


   그가 교포성당의 한인 신부에게 자신의 사정을 애절하게 말씀드리자 그 신부가 껄껄 웃으면서, “그 70불은 뭐 하러 가지고 있는가? 내가30불을 더 주겠으니 100불을 채워서 하느님께 바쳐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이 말씀을 듣고 기겁을 했다. 도대체가, 없는 사람에게 도와주지는 못하고 마치 벼룩의간을 빼먹는 그런 식이었다.


   성당도 역시 돈만을 좋아한다는 판단에 치를 떨며 일어서다가 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에게 70불이 있으나 없으나 결국은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망한 것 철저하게 망해 보자는 뜻으로 하느님께 바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얻으러 왔다가 도리어 털린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신부님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면서 눈물을 쏟는 중인데, 그때 어떤 자매가 신부님을 불쑥 찾아와서는 사람을 좀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금은방을 경영하는데 흑인이 무서워서 도무지 혼자 힘으로는 장사를 못하겠으니 성실한 남자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70불’의 남자가 운 좋게 소개되었으며, 그리고 지금은 그 가게를 인수받아 제법 성공한 축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실패한 사람마다 찾아다니며 바로 ‘지금’이 기회라는 말을 들려주곤 한단다. 대개의 경우 기회는, 보기 좋은 천사(?)의 모습으로 오기 보다는 보기 싫은 악마(?)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다.


   내 얘기를 한참 동안 듣던 그녀는 비로소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해 가정까지도 파탄 직전까지 이른 상황을 털어 놓았다. 이젠 함께 살아도 살 희망이 없으며 또 헤어진다 해도 다른 대책이 없는 진퇴유곡의 막다른 길에서 여인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울고 나더니 그랬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그녀가 오히려 내 손을 잡아 흔들면서 웃었는데 그 해맑은 웃음에는 진정 해탈의 자유로움이 있었다. 인생은 어렵게 보여도 어려운 것이 아니며 슬프게 보여도 결코 슬픈 것이 아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어떻게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억누르는 것들이 많이 있다. 돈이 우리를 짓누르고 사랑이 우리를 짓누르며 사치와 향락 그리고 질병과 재난이 우리를 또 짓누른다. 인생은 그래서 ‘고(苦)’라는 굴레를 계속 맴돌게 되지만 그러나 진정한 생의 발전은 바로 그  고(苦)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 소록도의 환우 한 분이 다리를 자르는 문제로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냄새 때문에 구역전체를 오랫동안 진동시켰으며 환우 자신도 굉장히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고집을 피움으로 해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다.


   나중엔 수녀님들이 권유로 드디어 허벅지까지 썩어 들어간 다리를 잘랐는데 그 영감님이 나중에 없는 다리를 가리키며 그랬다!  ”저는 이게 제 다리인줄 알았는데 이것도 결국 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이 칠십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비록 다리를 잃었지만 그러나 다리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은 것이다.


   세상이 ‘좋다’는 것은 사실 벗겨보면 다 지나가는 것이요 또 결국은 모두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싫다’는 것은 그 실체를 깨닫고 나면 다 소중한 것이요 또 우리인생을 밝게 빛내 주는 보물인 것이다. 그걸 모른다면, 그는 ‘삶’도, 그리고 ‘믿음’도 여전히 모르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만다.


  진정한 보물은 ‘두려움’으로 포장되어 있다!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소록도 본당 주임)

 

                                                    

                                     Mouche de force froidement ma  oie sauv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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