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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마리아 여인 / 최시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3 조회수905 추천수8 반대(0) 신고

 

 중동 지역은 아주 더운 곳이어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낮에는 여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들과 예수님은 한낮에 여행하고 있다. 일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을 만나셨는데 마치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처럼 길을 서들러 오셨다. 처음, 그 여인은 우울하고 ,눈도 바로 뜨지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를 주저하고 피한다. 그래서 인적이 없는 한낮을 이용해 물을 길으러 온 것이다.

 


  예수님의 몰골은 형편없었을 것이다. 서 있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정도로 지치셨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 안에 있는 생명력을, 그 가능성을 보시고 그것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대화가 조금씩 진행되어 갈수록 그 여인의 입에서 ‘기도, 예배, 그리스도’ 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인 안에 이미 있었던 요소들을 여인 스스로 만나고 확인하도록 도와주신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긴 대화를 통해 결국 예수님께서는 여인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아주 아픈 부분을 건드리셨다.

 

 “가서 당신 남편을 불러서 이리로 오십시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강한 부정이다. 즉 거짓말이다. 이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여인의 약한 부분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한 이 사실은 여인이 가장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장소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을 그대로 긍정해 주시고, 그곳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이 여인도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음 안의 변화를 느낀다. 그리고 이웃들 앞에서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와서 보십시오. 내가 해 온 짓을 모두 나에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굳이 가장 약한 곳, 상처받기 쉬운 곳으로 초대하실까? 그것은 우리가 그곳을 지나지 않으면 자유로워질 수 없고, 자유로워질 수 없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한다.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못나고, 약한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상처받기 쉬운 곳으로 우리를 가게하시고 자유롭게 해 주셨다. 자유롭게 된 사람은 자신에게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자유롭다.


  

 

 우리는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상처도 많고 부서지기 쉬우며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다. 부서지면, 약하면, 상처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꾸미기 시작한다.

 

이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들을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시는 분이 있다. 놀랍게도, 나는 이렇게 내가 싫은데 이런 나에게 그토록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시는 분, 바로 예수님 그분이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은 삶의 내용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아픔도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 ‘아 이분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시는구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시는구나,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구나.’하고 느꼈던 것이다.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조직 폭력배들이 사찰에 머물면서 스님들과 다툼이 일었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주지스님이 문제를 낸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먼저 채우는 편이 이긴다고 하면서 이긴 쪽의 말을 들으라고 한다. 양쪽 모두 온갖 수단을 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너무 화가 난 폭력배들이 항아리를 물에 집어 던지자 깨진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찼고 폭력배들이 이겼다. 폭력배 우두머리가 주지스님께 왜 자기들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궁금해 하자 주지스님이 이렇게 묻는다.


“너희들은 어떻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는가?”
“그냥 연못에 던졌을 뿐입니다.”
“나도 밑 빠진 항아리 같은 너희들을 내 마음에 던졌을 뿐이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그 장면이 기억날 것이다. 구멍이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못에 던졌을 때 잘 가라앉지 않고, 그 밑빠진 항아리를 눌렀을 때에야 쉽게 가라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이런 구멍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현존 안에 더 잘 머물 수 있게 된다. 하느님 현존이라는 심연에는 구멍이 있을수록 더 잘 가라앉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약함이나 결점이 우리에게 깊은 평화와 생기를 준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으로 인해 느끼는 평화보다 훨씬 더 깊은 평화이다. 사마리아 여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여인의 깊은 좌절, 상처가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 깊이 모시게 되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해방이며, 부활의 체험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의 약함과 상처를 숨기며 이것이 아니라고, 틀렸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부자유스러워진다. 부자유스러워지면 질수록 그만큼 우리는 나 자신도, 이웃도, 나아가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못하게 된다.


오늘 하루 우리를 치유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느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약함을 만나야 한다. 이웃도 마찬가지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러했듯이 내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나누어야 할 대상이고,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대상이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대상이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진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다.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나 보는 날들이 되길 바란다.

 

                                                                                           <예수회 홈 페이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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