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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의 눈동자 시리즈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4 조회수740 추천수10 반대(0) 신고

 

 

 

 용의 눈동자, 뱀의 발가락

 

 

 

 몇년 전인가 모 방송국 코메디 프로 중 형이 경영하는 ’원조 순대국 집’이 호황을 누리는 것을 본 동생 부부가 바로 옆에 ’원래 순대국 집’을 차려 놓고 형님네 식당 주방장에게 순대국을 맛있게 끓이는 비법(秘法, 신식 말로 노하우)을 알아 내려고 갖은 애를 쓰던 재미있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혼자 웃음질 때가 가끔 있습니다.

 

 똑 같은 옷감이 유명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치면 화려한 ’홧숀 쇼’를 빛내는 이브닝 드레스가 되는가 하면, 중 소 봉제공장을 거쳐 우리 서민들이 시장에서 적당한 값에 사입을 수 있는 ’옷’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같은 문자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도 구사하는 인물(作家)에 따라 세세 대대로 읽혀지는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이 될 수 있으며, 당대에 반짝 하거나 세상의 분란만 일으키는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같은 재료나 소재를 사용하여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이유가 많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그 끝 마무리가 깔끔하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던 중 글이나 그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의 마무리에 관하여 용과 뱀을

대비(對比)한 화룡점정, 사족, 용두사미라는 고사성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백과사전(두산 세계 대백과)을 찾아 그 뜻을 알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화룡점정 [畵龍點晴] :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사족 [蛇足] :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일을 덧붙여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이르는 말. 원래 뱀[蛇]의 발이란 뜻으로 필요 없는 부분까지 그려

                     넣는다는 말이다."

 

"용두사미 [龍頭蛇尾] : 용 대가리에 뱀의 꼬리란 말로 시작은 그럴 듯하나 끝이

                                  흐지부지한다는 말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고사성어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니 앞으로 저도 글을 쓰거나 무슨 일을 할 때는 시작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용의 눈동자(龍睛)를 그리는 깔끔한 마무리를 하여야겠고, 뱀의 발가락(蛇足)을 그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끝 -

 

 

 

 

 

 

사족(蛇足) 한 마디- 그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이 경영하던 ’원조 순대국 집’의

                    순대국이 맛이 좋아 손님이 많고 번창한 비법은 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주방장이 주인을 골탕 먹이려고 주인 모르게 순대국 깊숙이

                    맛있는 고기를 듬뿍 넣는 ’깔끔한 마무리(?)’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 - 화룡점정(畵龍點睛)

 

 

 

  제가 쓴 글 중 바로 앞 글에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의 눈동자를 그리는 깔끔한 끝 마무리)의 예(본보기)를 이효석님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발견하고 이효석님과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소설의 끝 부분을 올립니다.

 

 

 

이효석

 

 "호 가산(可山). 강원 평창(平昌) 출생. 경성 제1고보를 거쳐 경성제대(京城帝大)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작가(同伴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희(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가 된 후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交感)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秀作)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화분》 외에도 《벽공무한(碧空無限)》 《창공(蒼空)》 등의 장편이 있으나 그의 재질은 단편에서 특히 두드러져 당시 이태준(李泰俊) ·박태원(朴泰遠)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출처 [두산 세계 대백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1936년 《조광(朝光)》지에 발표.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왼손잡이요 곰보인 허생원은 재산마저 날려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가 된다. 그 허생원이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선달을 따라 충주집으로 간다. 그는 동이라는 애송이 장돌뱅이가 충주댁과 농탕치는 것에 화가 나서 뺨을 때려 쫓아버린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걷게 된다. 허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어떤 처녀와 밤을 새운 이야기를 한다. 동이도 그의 어머니 얘기를 한다. 자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지는 바람에 동이에게 업히게 되는데, 허생원은 동이 모친의 친정이 봉평이라는 사실과 동이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것을 알고는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발길을 옮긴다. 전편에 시적(詩的) 정서가 흐르는 산뜻하고도 애틋한 명작소설이다."----- 출처 [두산 세계 대백과]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끝부분

 

 허 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 끝 -

 

 

 

 

 

 이중섭의 그림 '소' - 화우점정(畵牛點睛)

 

 

 제가 올린 바로 앞의 두 글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의 눈을 그리는 깔끔한 끝마무리)이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와 그 예(본보기)로 이효석님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끝 부분을 올린 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중섭님의 그림  "소" 에서 화룡점정의 끝마무리를 발견하고 제나름대로 화우점정(畵牛點睛:소의 눈을 그리는 깔끔한 끝마무리)이 아닐까 생각하고 이중섭님과 님의 작품 "소" 에 대해서 올립니다.

 

 

 

 이중섭 [李仲燮]

 

 

 "호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 출처  [두산 세계 대백과]

 

 

 이중섭님은 1916년 태어나서 1956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 했습니다. 님은 특히 황소를 많이 그렸는데 소 말고도 가족, 닭, 게, 물고기등을 그린 서정적, 격정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들 그림 중에서 님의 필력이 가장 잘 나타난 걸작들은 역시 황소 그림들입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유명한 화가가 용을 다 그린 후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고사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생겼듯이 이중섭님도 소를 다 그린 후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이중섭님 그림에서 소는 시대 상황이나 님이 처한 환경, 건강에 따른 님의 화우점정(畵牛點睛)으로 한가로히 풀을 뜯는 목가적인 누렁소가 되고, 불타는 투혼의 싸움소가 되며, 절망으로 몸부림 치는 미친소가 되기도 합니다.

 

 

 

 

                                                    

                                                      - 끝 -

 

 

 

 

 

 이효석과 이중섭의 닮은 점

 

 

 

 오늘은 이효석 님과 이중섭 님의 닮은 점을 생각해 보면서 "용의 눈동자" 시리즈를

마무리 할까 합니다.

 

 

이효석 님과 이중섭 님은 다른 점도 있지만 닮은 점이 더 많습니다.

 

 

그 첫째로,  두 분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태어 나시어 교육을 받고 활동

                 하시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분이 모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효석 님은 경성제대(현 서울대학교)에서

                 이중섭 님은 일본 유학을하여 공부하고, 조국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며 당대에 천재성을 인정 받는 어느모로는

                 행복한 분들이셨읍니다.

 

두 번째로,  두 분은 빼앗긴 조국에서, 동족상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음을 불사르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셨으며 그 작품들은 님들이 살아 계셨을 때 보다

                 돌아가신 후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끈질긴 목숨을 부지하면서 부도수표 남발하듯

                 작품을 찍어내어 부(富)를 축적하고 노추(老醜)를 들어내다가 세상을

                 뜨면 곧 잊혀지거나 욕을 듣는 자칭 대가와 천재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세 번째로,  두 분은 장르는 다르지만 다루셨던 소재나 작풍(作風)이 지극히 한국적

                 이고 소박하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교감하는 향토색 짙은 작품들

                 이라는 것입니다.두 분은 괜시리 어려운 주제나 정치적 이슈를 들고

                 나와 세상의 편을 가르고 분란을 일으키며 읽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고개를 갸웃둥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로,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무엇을 크게 떠벌였는데 실제

                 결과는 작다는 뜻)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자기가 그린 그림이나 쓴 글에 대해

                 자화자찬(自畵自讚), 자필자찬(自筆自讚)하는 잘못을

                 두 분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로,  두 분의 닮은 점 중에 가장 큰 것은 용의 눈동자를 그리는 끝 마무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님들은 정곡(正鵠 : 과녁의 한 가운데)을

                    찌르므로써 글의 변죽을 울리거나 그림의 개칠을 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 했습니다.  아울러 두 분의 끝 마무리에는 독자들이나

                    감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여운을 남겨 조용히 즐기게하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용의 눈동자 시리즈  - 끝-

 

 

 

 

 

 

 

 
이강길

이강길                                                  이중섭 갤러리 ㅣ펌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 을 써서 대이상향 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가족

종이에 유채, 41.6×28.9cm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소와 새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소와 어린이

나무판에 유채, 29.8×64.4cm 
기진맥진한 소는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지고 가던 지게를 세우고 남자아이가 딱한 처지의 소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앉아 두 손으로 꼬리와 뒷다리를 쥐었다. 무슨 행동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재빨리 소 불알을 훌트면 기운이 버쩍 난다고 한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곤란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히 계산되었으므로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닭과 가족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이라는 주제는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월남한 이산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이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극단적인 예였다. <가족>의 위쪽의 아이에게 긴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을 꽃을 쥐도록 했는데 꽃잎이 뚝뚝 듣도록 했고, 아내쪽에는 새를 배치했다. 셋 모두 앞을 보도록 한것과 달리 아래의 아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도록 하고, 고개를 쳐들어 셋을 보도록 연출했다. <닭과 가족>의 닭은 결혼직후 이중섭이 일삼아 키우기도 했고, 즐겨 먹던 것이다. 두 아이는 병아리가 든 광우리를 들고, 아래 두 사람은 성징이 불분명하여 아이들로 착각하게 하지만 암탉을 안은 듯한 왼쪽은 아내고, 오른쪽은 지아비로 닭에게 어떤 작용을 가하고 있다.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박명자-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 하다. 일어서서 날아오를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후자는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보강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납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어떻게 보든 함의가 풍부한 그림이다. 비슷한 유형의 그림이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고 하는데, 새들 이나 애정 이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까마귀는 6.25 전쟁 전만 해도 흔다던 새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포성과 화약 냄새 때문인지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통영에서 그려졌다고 하는데 평화로웠던 그 곳에서 반갑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릴 소재다. 까마귀를 이루고 있는 붓질을 자세히 보면 날려져 있어서 마치 글씨예술(서예)의 비백과 같다. 그래서 전통 예술의 냄새가 진한 것이다. 대한 미협전에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종이에 유채, 36×27cm, 1951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앞은 거대한 물고기와 노는 두 남자아이를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래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주도 또는 부산 시절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본다. 뒤의 것은 물고기와 게를 앞세운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앞사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는 방법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새을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밖에도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맨 앞과 뒤에 있는 아이들이 잡은 끈인데, 이를 두 번째 아이가 잡아 당기므로 해서 더욱 재미있게 연관지웠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 평면으로 칠하고 테를 둘러 정연해 보이나 억센 붓질로 그렸다.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발 앞에 있는 게를 잡으려는지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아이를 그렸다. 턱을 쳐들고 위를 보도록 해 얼굴이 마치 고개를 뒤로 젖히듯 배치되어 있는데, 몸체는 앞을 향하고 있다. 또한 게가 정확히는 풀빛에 가까운 특이한 색으로 눈길을 모은다. 이런 눈속임 장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중섭의 연출이 그만큼 높은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전체는 매우 거칠게 그려졌는대 칼칼한, 조야한 맛을 우리 미감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횐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또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종이에 유채, 27.5×41.5cm
다친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소 그림에서도 매우 드문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므로 뿔을 앞세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태세다. 거의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흰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 같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 같다.

복사꽃이 핀 마을

종이에 유채, 29×41.2cm, 1953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 남긴다. 이 그림은 이곳에서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의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소그림들에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맛이다. 이런 것이 기운생동의 미감이 아닐까?

종이에 유채, 41.5×28.8cm, 1953년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 전면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환희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1955년 
복숭아꽃이 수 놓여진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감을 두껍게 쌓이도록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말린 위에 전면적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긁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간혹 사용했던 기법이다. 자부와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무덤벽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전람회가 열린 미국공보원의 직원이 간직하던 것이다.

종이에 유채, 18.4×32.5cm, 1954년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갈색조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선은 흰 선의 한 자락을 집어들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의 주변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손을 그린 2점 중 하나로,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유채와 연필, 10.5×12.5cm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5×37cm, 1953년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먹과 수채, 10.5×12.5cm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는 즐겨 그려졌던 그림으로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세 명의 남자아이가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원산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와 부모의 약?대신으로 얻어간 그림이라고 한다. 벌거숭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붉은 색조와 초록빛을 띤 물고기의 색이 독특하다. 물고기, 게와 노는 두 남자아이는 거의 같은 상태로 무려 다섯 번이나 그려진 것으로 학인된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거의 같은 소재를 거듭 탐구하듯 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부부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중의 하나. 싸우는 듯한 설정인 도판 11과 흡사하나 아래 
암탉의 자태를 보면 교미를 위한 자세다. 두 마리의 닭이 모여 이루는 형태가 꼬리로 인하여 덜 완결되기는 했지만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는데서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으로 된 언어다.

여섯 마리의 닭

종이에 연필과 수채, 26×36.5cm
두 마리의 닭을 통해 다툼과 어울림의 여러 정황을 노래한 이중섭은 여러 마리의 닭이 펼치는 드라마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즐기던 소재를 더욱 심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한데, 푸르고 붉은 색깔의 닭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중앙 뒤의 닭을 빼고 오른쪽 닭의 꽁지를 잡고 있는 남자아이를 선으로만 그린 연필화 한 점이 전한다.

닭과 게

종이에 연필과 과슈, 29×41cm
앞에서 살펴 본 그림의 왼쪽 위에 등장하는 닭을 그대로 옮겨진 듯 그려져 있고 닭이 굽어보는 쪽에는 게 한 마리를 배치했다. 게 주위에는 복숭아꽃잎을 배치하여 닭이 물고 있는 복숭아와 연관을 지니도록 했고 색채로도 청색과 분홍빛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꾀해 하나의 산뜻한 소품을 완성했다.

여인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중섭의 초기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그린 연필화로 전 해에 그려 지유텐에 출품한 것이 엽서그림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굵직한 연필선이 특징인데 훗날 특장이 되는 굵고 거친선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의 개성이 벌써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은 고갱이 자주 그린 태평양 연안지역에서 입는 사롱이라는 치마와 흡사한데, 이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향이라는 서명은 이 그림에서 처음 쓰였다. 훗날 아내가 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소년

26.4×18.5cm, 종이에 연필, 1942∼5년

세 사람

18.2×28cm, 종이에 연필, 1942∼5년
8. 15직후에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기 위해서 원산에서 들고 왔으나 늦어서 미수에 그쳤다는 바로 그 그림들이다. 1943년 이래 그 때까지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42년에 그렸던 것을 다시 손 봐 출품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년>은 화면의 거의 다를 차지하는 헐벗은 둔덕 가운데 난 길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가지만 벌린 나무가 있고 아래 구석에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가 있다. 무대는 어느 산등성인 듯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 아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가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스산한 정감이다. 이러한 느낌을 하늘에는 가로줄을, 헐벗은 땅 부분에는 무수한 세로줄을 그었다가는 지우거나, 바탕재인 종이가 패일 듯 힘주어 그음으로써 더욱 강화했다. <세사람>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스산한 감정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숨으려 드는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 단말마와 같은 일제의 등살에 못살게 된 식민지 민증의 내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1940년 말에서 1941년 후반기 사이에 그린 그림 엽서
14×9cm
후배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중섭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드리던 이중섭은 겨울을 맞아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고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를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활을 쏘는 사람들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14cm 1941년 말

소와 말을 타는 사람들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1년말
소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다. 1941년 한 해 동안 작은 크기이지만 80매에 이르는 그림을 고심해서 그렸다.

환상적인 바다풍경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0년말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를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
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1956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개인전 직전 처음 크게 건강을 상해 병원에 입원했던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마치자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은 서울로 가서 병원을 오가던 그가 다소 안정을 되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가리키는데 크레파스를 그어 마련한 거칠거칠한 질감이 계절 분위기를 잘 살렸다. 그러나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상태로 등장하는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플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희거나 노란 색을 칠한 새가 그런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구상네 가족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1955년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어른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어른 여자와 한 아이가 이를 쳐다보고 있고 화면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부러워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과 이중섭이 서로 손을 조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서로의 우정에 대한 표시라 여겨진다. 이중섭이 입고 있는 옷은 이즈음 그려진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옷으로 보인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년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왼쪽의 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한쪽마저 상대방에게 올려놓았다. 싸움이 바야흐로 끝나려는 광경이다. 이런 설정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 소도 이긴 소도 모두 몰골이 형편없어서 싸움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위의 작품과 함께 1955년 5월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것이므로 말년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돌아가기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1956년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검게 표현되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하는 비슷한 일련의 그림 중 하나이다. 화면의 전체에 물감이 칠해지고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고, 하단에 담을 설정해 흰 새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제목은 당시 막 개봉된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린 것 같다.

옛이야기

장판지에 유채, 31×41cm, 1956년 
정릉에서 살던 만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한다. 사슴과 학으로 여겨지는 동물과 불로초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이상을 배경으로 한 십장생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운 날씨인 듯 한데 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상투까지 틀고 있어서 의외의 느낌이다. 복고적인 태도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작품들이 꽤 그려졌으나 환영받지 못하여 사장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달밤

종이에 잉크와 수채, 17.5×13.5cm
구름에 쌓인 달을 바라보고 누운 어린이가 나오는 특이한 설정의 그림이다. 달과 구름은 자주 애용되는 전통적인 문화의 한 품목이지만 그것을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재를 소화해낸 방식에서 우리는 전통을 어떻게 잘 살려냈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구름을 처리한 방식에서 그가 소재로만 다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덩어리 구름과 꼬리 구름을 소화한 방식에서 전통적인 미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아래에 자족적인 남자어른이 아니라 누운 어린이를 배치하여 자연과 어린이로 새롭게 끌고 간 점이 이중섭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24.5cm
일본에 건너 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의 하나다. 서귀포에서 살 때 
자주 가서 놀던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즐거이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과의 유대를 흐트리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7×39.5cm
두터운 바탕칠 위에 정성들인 선묘로 아이들과 나뭇잎, 물고기를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끈을 설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에는 채색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왼쪽의 아이는 뒤만 보이고 머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라면 그림에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셈이다.

꽃과 어린이

종이에 펜과 수채, 17 ×15.3cm 1940년말

네 어린이와 비둘기

종이에 연필, 31.5×48.5cm
이 그림이 상당히 큰 규모라서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이중섭의 작품들을 흔히 스케치나 소묘, 또는 밑그림이라고 부르기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근래 들어 이런 그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현상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연필화로 부르고자 하며,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요즘은 덜 하지만 중국, 일본과 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글씨예술(서예, 서도를 가리킴)이 발달한 우리의 경우 붓이나 연필을 구사하는데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이중섭은 1940년대붙터 이를 감지하고 독특한 붓질과 연필구사법을 개발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종이 위에 확신을 가지고 긁다시피 그어댄 선의 맛은 그 자체 독자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꽃과 어린이와 게

종이에 잉크, 9 ×14cm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어린이

종이에 펜과 유채, 19.2 ×12.2cm

개구리와 어린이

종이에 잉크와 수채, 10.5 ×25.7cm

판자집 화실

종이에 펜과 수채, 26.8×20.2cm
방 하나인 판자빙의 네 벽에서 한 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부를 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지붕과 실내는 약간 비스듬하게 설정해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했다. 그림그리기를 마치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도 봉트까지 쓰기를 마치고 누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자족한 모습이다. 겨울 언저리임을 알 수 있는 풍경과 주변 색깔에 비해 자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란색은 매우 효과적이다. 창조의 기쁨에 다른 곤란은 문제도 아니라는 이중섭의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다.

작품

1904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소와 소녀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소묘

종이에 연필, 23.3 ×26.6cm 1941년, 제6회 지유텐 출품작

망월

제4회 지유텐 출품작

그림엽서

1941년 중반기

망월

1943년 제7회 지유텐출품작

오지환 시집의 속표지 그림

종이에 연필, 26.5 ×33cm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은박지에 유채,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소장

동원유원지

종이에 연필과 수채, 유태 19.2 ×26.5cm

게와 담배대

종이에 연필과 수채 19.2 ×2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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