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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l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5 조회수798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기념


대 알베르토 주교는 1206년 독일 도우나 강변 라우인겐에서 태어났습니다. 1223년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훗날 사제가 된 그는 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빈민 구제 등의 활동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260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그를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하였으나, 대 알베르토 주교는 일찍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교단에서 가르치며 살다가 1280년 선종하였습니다. 비오 11세 교황은 1931년 그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성인의 반열에 들게 하였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7,19)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배은망덕하다고 말합니다. 은혜를 입고 감사하기는커녕 우리 속담에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까 내 봇짐 내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은혜를 입고도 적반하장인 경우도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나아가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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