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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께 영광을 되돌려드리는 일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5 조회수1,163 추천수4 반대(0) 신고

<주님께 영광을 되돌려드리는 일>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1-19)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한 나병환자들은 과연 우리의 이 병이 나을 수 있을지 의심을 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니면 말고 식의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들의 병이 깊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은 병에 오래 시달릴수록 외부와 단절하고 자기에게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경과에서는 이를 건강염려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하면 자폐증으로 발전한다고도 합니다. 자신하고만 씨름해 왔기에 그는 문제해결도 자기가 해결해야만 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외부에 도움을 청할 줄 모르게 됩니다.

  또 그는 심각한 소심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남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소심증을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부에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강한 열망과 함께 나약한 자세를 아울러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지닌 약점을 극복할 수 없다고 자책하며 지냅니다. 정신 병리학에서는 소심증을 가져오는 원인을 그가 실제로  어떤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 그가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소심증을 치유하는 데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소심증을 치유하는데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자신에게 믿음과 여유를 되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을 외부의 병만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게 만드시어 그들이 겪는 내부의 병에서도 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제에게 보이라고 시키신 것은 단순히 레위기 14장에서 말하는 정결규정을 지키라는 의미 못지않게 그들이 심리적으로 겪고 있었던 자폐에서 벗어나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열 명의 나병환자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아직 갖지 못한 것입니다.


  치유 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에 단 한사람만이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을 예수님께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의 친구로부터 이 세상 무엇보다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기도와 청원을 바쳤던가요? 그 때 어떤 지향으로 바쳤던가요? 혹시 아홉 명의 유대 나병 환자들처럼 자기 자신 만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2-3절에서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고 말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모든 고난이 있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청원해야 올바른 자세일까요? 하느님의 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라고 청원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원이 이루어 졌다면 주님의 영광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잘나고 예뻐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갔던 사마리아 사람이 칭찬을 받은 것은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보였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고난과 고통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우선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주어졌느냐고 원망만 했습니다. 그저 당장 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만 해달라고 매달렸으며, 혹시나 제 자신의 죄가 깊어 그런가하고 죄책감에만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께서 쓰신 책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제목에 나오는 어느 신부님의 자세는 이를 분명히 드러내 보입니다.


  젊고 삶을 열정으로 살아 사람들에게 기대와 사랑을 받던 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 불치병이 닥쳐왔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다가온 이 난데없는 십자가를 도저히 수용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 마음의 갈등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성 착한 신부님은 그리 오래지 않아 그 열악한 상황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통을 참아내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 물결처럼 닥쳐올 때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에 합치시키겠노라고 숱하게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고통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문병하러 오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오랜 시간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더 이상 사목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신부님은 자신의 남은 삶을 재편성하였습니다.

  고통의 수용과 끊임없는 기도, 불굴의 인내로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아름답게 엮어 갔습니다. 신부님은 고통과 절망의 장소인 죽음의 병실을 기쁨과 평화의 장소, 회개와 구원의 장소로 변화시켰습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마지막 날’을 묵상하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맞는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묵은 껍질을 벗어 버리는 과정입니다. 꽃과 잎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나무가 여름에 애를 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 역시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입니다.”


  그 마지막 날이 오랜 세월 우리가 지니고 살아 왔던 모든 상처와 좌절, 번민과 의혹이 구원의 기쁨으로 변화되는 순간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의 날이기에 기뻐 뛰노는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신부님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으며,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일 매 순간을 꽃봉오리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눈물겹도록 고마워했습니다.


  바로 이 젊은 신부님께서 보여 주신 자세가 예수님께 영광을 되돌려드리려고 찾아온 그 사마리아 사람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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