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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20 조회수801 추천수6 반대(0) 신고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 1950년대 중반(中盤), 저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보니 국민학교 다닐 때와 확실히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명찰(이름표)이 달린 교복(校服)을 입고 학교 뺏지가 부착된 교모(校帽)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기르던 머리는 빡빡 깍아 기계충과 땜통이 있던 아이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 싫어 했습니다. 다음으로 걸어 다니던 통학(通學)길이 멀어져 어린 나이에 만원(滿員)버스와 전차(電車)를 타고 교통지옥(交通地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엄마나 누나 손 붙들고 마음대로 드나들던 영화관(映畵館)에 못가는 고통(苦痛)을 감수(甘受)해야만 했습니다.

 

 보고싶어 못 견디겠는 영화(映畵)를 보려고 사복(私服)을 입고 극장(劇場)에 잠입(潛入)했다가 여러 학교 훈육(訓育)선생님들로 이루어진 합동단속반(合同團束班)에 걸려 이름을 적히는 날에는 말 그대로 ’끽’(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모양으로 표현)이었습니다, 실제(實際)로 각(各) 학교(學校)의 학생들에 대한 정학사유(停學事由)에서 극장출입(劇場出入)이 으뜸을 차지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중, 고등학생(요즘 말로 중, 고딩)들의 문화욕구(文化慾求)를 어느정도 충족(充足) 시켜주고 좋은 영화는 학생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교육적(敎育的) 차원(次元)에서 문교당국(文敎當局)에서는 학교 별로 영화의 단체관람(單體觀覽)을 허용(許容)했습니다. 단체관람은 개봉관(開封館)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개봉관으로는 광화문의 국제극장, 종로3가의 단성사, 퇴계로에 새로 생긴 대한극장---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대한극장은 1956년 미국 폭스社의 설계로 새로 지어진 객석(客席) 1900여席의 대형극장으로서 초대형 70mm 영사기(映寫機)와 최첨단 음향시설(音響施設)을 두루 갖춘 당시로서는 꿈의 문화공간(文化空間)이었습니다. 개관(開館) 후 대한극장에서는 ’남 태평양’, ’사운드 어브 뮤직’. ’벤허’ 등  수 많은 명화(名畵)를 상영(上映)하여 우리나라 문화발전(文化發展)에 크게 기여(寄與)했습니다. 대한극장은 최근(最近) 들어 극장의 형태(形態)가 영화만을 상영하는 대형극장 위주(爲主)에서 쇼핑과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멀티플렉스館으로 전환하는 추세(趨勢)에 따라,「징기스칸(The Conqueror)」상영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막대한 공사비을 투입하여 2002년에 많은 상영관을 갖춘 초대형 영화관으로 새롭게 개관했습니다.

 

 중, 고등학교에서 일요일 오전에 영화 단체관람이 결정(決定)되면 며칠 전에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책상을 두두리며 좋아했고, 마치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듯이 손 꼽아 기다리다가 관람일이 되면 오징어, 땅콩에 사이다를 마시며 킥킥대고 영화를 보다가 크라이막스 때나 주인공(主人公)이 적(敵)에게 이기는 場面(장면)에서는 박수(拍手)를 쳤습니다. 그 무렵부터 콜라와 팝콘(서양 걍냉이 튀김)도 선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5, 60년대 중, 고딩들은 이렇게하여 당대(當代)를 풍미(風味)하던 수십여 편의 명화(名畵)에 접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정서발달(情緖發達)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었으며,  아련한 향수(鄕愁)와 추억(追憶)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감동(感動)을 받고 기억(記憶)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오늘은 동명(同名)의 소설(小說)을 영화화(映畵化)하여 히트한  두 편의 작품(作品), ’海底(해저) 2 萬里(만리)’와 ’백경(白鯨)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드리고 두 작품에서 출현(出現)하는 대왕오징어와 향유고래에 관하여 공부해 볼까 합니다.

 

 

      *                          *                          *                          *                          *

 

 

 먼저, ’백경(白鯨)’에 대하여 4, 50년 전의 기억(記憶)을 더듬으며 영화를 본 감상(感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때는 19세기 중엽(中葉) 대서양(大西洋)에 면한 아메리카 대륙 어느 산록(山麓)마을에 ’이슈멜’이라는 청년(靑年)이 살았는데, 그가 계곡(溪谷)과 강(江)을 따라 돈을 벌러 바다로 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4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의 기억에 "이슈멜이라고 합니다"하면서 젊은 주인공(主人公)이 개나리 봇짐을 메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첫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바닷가 고래잡이 마을에 도착(到着)한 이슈멜은 여인숙(旅人宿)에 짐을 풀고 여인숙 술집에서 고래잡이 선원(船員)들을 만나 고래사냥에 합류(合流)하게 됩니다. 날을 잡아 포경선(捕鯨船)은 출항(出航)하고 얼마 후, 고래 한 마리를 발견한 그들은 세 척의 보트를 내려 작살과 창살을 고래의 등에 꽂아 잡아서 배에 끌어 올려 고래기름을 짜서 선창(船倉)에 보관(保管)합니다. 포경선의 선장(船長, 그레고리 펙 粉)이 보통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가 젊었을 때 백경(白鯨, 흰고래)를 사냥하다가 왼쪽다리를 고래에게 먹혔기에 고래 아가리뼈로 만든 의족(義足)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항해(航海)의 목적(目的)도 온 세상(世上) 바다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백경을 찾아 복수(復讐)하려는 일념(一念)에서 였습니다.

 

 어느날, 돛대 위에서 망(望)을 보고 있던 이슈멜이 수백마리의 고래 떼를 발견(發見)합니다. 신바람이 난 고래잡이들은 고래를 쉴새없이 잡아 올리는데, 다른 포경선이 나타나 "백경을 며칠 전에 보았다."는 소식(消息)을 전하자 선장은 고래사냥을 멈추고 백경을 찾아 나설 것을 명(命)합니다. 고래잡이들의 반발(反撥)도 잠깐 선장의 이글거리는 복수심(復讐心)과 불타는 카리스마에 이끌려 고래잡이 배는 선수(船首)를 돌려 백경을 찾아 빠르게 물쌀을 갈랐습니다.

 

 드디어, 전세계(全世界) 대양(大洋)을 누비며 찿아 헤메던 백경과 마주쳤습니다. 고래 아가리뼈 의족(義足)의 선장이 자기의 잃어버린 왼쪽다리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보트를 내려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습니다. 세 척(隻)의 보트에 나누어 탄 고래잡이들은 온힘을 다해 백경을 쫓았고, 작살잡이들은 작살을, 항해사(航海士)들은 창살을 수도 없이 백경의 등짝에 힘껏 던져 쑤셔 박았습니다. 흰 눈 덮인 산(山)만한 크기의 백경에게 보트의 노는 ’이쑤시개’에 지나지 않았고, 작살과 창살은 기운(氣運)을 돋구는 ’주사바늘’과 ’수지침’과 다름 없었습니다. 백경은 수구(水球)선수가 수구 공 가지고 놀 듯 보트 3척을 날려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성이 안 찬 백경은 수백톤의 고래잡이 배로 어뢰(魚雷)처럼 돌진(突進)하여 침몰시켰습니다. 선장(船長)이하 수십명의 선원이 익사(溺死)하고 단 한 사람 ’이슈멜’만이 다른 포경선(捕鯨船)에 의하여 구조(救助)되어 유일(唯一)한 생존자(生存者)로 남았습니다.

 

 

’모비 딕’이라 이름지어진 백경(白鯨)이 바로 고래의 일종(一種) 향유(香油)고래입니다.  

 

 

 다음으로, ’해저 이만리’를 감상(鑑賞)한 소감(所感)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경(白鯨)’이 바다 위(海上)에서 푸른 파도를 헤치며 고래와 싸우는 고래잡이들의 사투(死鬪)를 그린 작품(作品)이라면, 조용한 바다 밑(海底)에서 어둠을 가르며 대모험(大冒險)을 펼치는 공상과학(空想科學)의 세계를 선보인 SF영화의 효시(嚆矢)가 ’해저 이만리’라 할 수 있습니다.

 

 때는 19세기 후반(後半), 세계 도처(到處)의 바다에서 고래보다도 크고 무지하게 빠른 괴물(怪物)이 출몰(出沒)하여 여러 척(隻)의 배를 침몰(沈沒)시키는 해난사고(海難事故)가 빈번(頻繁)히 발생하자, 프랑스 박물관에 근무하는 어느(某) 박사 등 몇명이 괴물을 찾아 나서 마침내 먼 바다에서 만나게 됩니다.

 

 괴물이란 다름아닌 자연보호주의자(自然保護主義者) 네모 선장이 이끄는 잠수함(潛水艦) ’노틸러스 號’였습니다. 노틸러스 호로 안내된 이들은 해저(海底)에서 대 모험(大 冒險)을 펼치게 되는데, 한창 호기심(好奇心) 많던 중, 고딩 들은 ’백경(白鯨)’을 감상(鑑賞)할 때와는 또 다른 감흥(感興)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율(戰慄)을 느끼며 미지(未知)의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전력(電力)을 동력원(動力源)으로하는 노틸러스 號의 선내(船內) 생활과 해산물(海産物) 요리, 잠수복(潛水服)을 입고 잠수함 밖으로 나가 해저평원(海底平原)을 산책을 하며 모험(冒險)을 하는 등 흥미진진(興味津津)한 장면(場面)이 많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해저 이만리’ 신(scene)의 압권(壓卷)은 거대(巨大)한 오징어가 시커먼 먹물을 품으며 나타나 열 개의 다리로 노틸러스 호를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주인공(主人公, 커크다그라스 粉)이 선체(船體)를 휘감은 오징어의 다리를 도끼로 내리쳐 자르는 등 사투(死鬪)를 벌여 가까스로 물리친 것으로 기억됩니다.

 

 

영화 ’해저 이만리’에서 잠수함 노틸러스 호를 공격한 오징어가 바로 대왕오징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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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에 대하여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향유고래 [香油고래, sperm whale]      

 

 

 몸길이 수컷 15∼18m, 암컷 11∼13m, 몸무게 수컷 57t, 암컷 43.5t이다. 향고래·말향고래라고도 한다. 대형의 이빨고래류로서, 이빨고래류 중에서 가장 크다. 몸빛깔은 회색이나 배쪽에 옅은색의 얼룩점이 있는 개체가 많다. 몸빛깔은 나이와 더불어 백화(白化)하는 경향이 있다. 머리는 성장에 따라 커져서 몸길이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등지느러미는 없지만, 파도 모양의 피부돌기가 있다. 아래턱은 통나무처럼 가늘고 길며, 한쪽에 20∼28개의 큰 이빨이 있지만, 위턱의 이빨은 퇴화되어 눈에 띄지 않는다. 가슴지느러미는 몸에 비해 대단히 작다.

 

 잠수력이 뛰어나 1시간이나 잠수할 때가 있으며, 또 수심 2,200m나 되는 해저의 케이불에 걸린 예도 있다. 주로 오징어를 먹지만 때로 물고기도 먹는다. 임신기간은 15∼16개월이며, 3∼5년마다 한배에 1마리를 낳는다. 거대한 머리에서 품질 좋은 기름을 얻을 수 있고, 대장에 덩어리 형태로 생기는 병적인 생성물은 용연향(龍延香)이라 하는데, 안정제로 쓰이는 값비싼 향료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지의 바다에 분포한다.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대왕오징어

 

 

 수심 3백~1천m의 심해에 사는 대왕오징어가 살아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 단지 죽어서 바닷가에 밀려왔거나, 그물에 걸려 죽었거나, 향유고래의 위 속에 들어 있는 잔해를 보았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대왕오징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더욱 신비에 싸여 있다. 우리는 심해에 사는 대왕오징어의 생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대왕오징어보다 멸종된 공룡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대왕오징어는 무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크며, 눈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커 지름이 30~40㎝나 된다. 여태까지 발견된 가장 큰 대왕오징어는 1800년대 말 죽어서 뉴질랜드 해안으로 밀려온 것으로, 몸길이 18m에 몸무게는 1t이 넘었다. 199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 해역에서 15m짜리 대왕오징어가 그물에 걸린 채 죽어서 올라온 적이 있다.

 

 눈은 배구공만큼 크고, 입은 야구공만한 것이 단단한 앵무새 부리처럼 생겼고, 다리는 사람의 허벅지만큼 굵었다. 이 대왕오징어로 오징어 순대를 만든다면, 굵기가 트럭 바퀴만 할 것이다. 해양생물학자들은 이보다 더 큰 대왕오징어도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네이버 오픈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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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앞에서 1950년대 후반(後半)과 60년대 초반(初盤)에 걸쳐 보낸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學窓時節)을 회고(回顧)하며, 특히 단체관람(單體觀覽)했던 수 많은 명화(名畵) 중 ’백경(白鯨)’과 ’해저 이 만리’를 감상(鑑賞)한 소감(所感)을 말씀드리고 등장(登場)하는 두 동물(動物)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4, 50년 전을 회상(回想)하며 학창시절의 추억담(追憶談)과 두 동물을 공부하며 얻은 여러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  저는 6. 25 전쟁이 휴전(休戰)되기 전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

         하여 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학교를

         다니게 해 주신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고아(戰爭

         孤兒)도 많았고, 가난하여 학업(學業)을 계속하지 못하는 같은 또래의 청소년

         (靑少年)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 이용(利用)하던

         시내버스 차장(車掌)들만해도 학교를 다녔으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형님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시내(市內)에서 청량리를 거쳐 중량교가

         종점(終點)인 버스 노선(路線)이 있었는데, 차장 형들은 손님을 끌고 안내

         (案內)를 위하여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멘트(ment)를 반복적(反復的)

         으로 하다보니 기운도 떨어지고 하여 나중에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나요."

 

         차장 형들은 승객(乘客)들을 거칠게 다루고, 승객들과 싸움을 한다는 이유

         (理由)로 얼마 후에는 차장 누나들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가난한 집안살림 때문에 입하나 던다고 고향집에서 부모 곁을 떠나 남의 가게

         점원(店員)으로, 공장 직공(職工)으로, 밥 술이나 먹는 집 가정부(家政婦)로

         전전(轉傳)하였습니다. 이 분들 중에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훌륭하게

         되신 분들도 많고, 많은 분들이 산업역군(産業役軍)으로서 국가발전(國家發

         展)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산(財産)의 많고 적음, 학력(學歷)의 차이(差異), 지위(地位)의

         높고 낮음보다 더욱 중요(重要)한 것은’사람이 되고 안됨’이라고.  

 

 

둘,  5, 60년대의 중, 고딩들은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이 결정되어 관람일(觀覽日)

      며칠 전 종례시간(終禮時間)에 담임선생(擔任先生)님께서 이 중대사실(重大事

      實)을 발표하시는 순간(瞬間)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작약(歡呼雀躍)했습니다.

      그날부터는 잠도 잘 안오고 영화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마치 소풍 갈

      날만 기다리는 국민학생처럼.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소풍(逍風)을 원족(遠足)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조금 먼 거리의 절(寺刹)이나 능(陵)에 걸어서 가 싸가지고 간 음식을

      둘러앉아 맛있게 먹고, 보물찾기 등 놀이와 노래, 율동(유희라고 했슴) 등 여흥

      (餘興)을 즐기다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초딩시절 운동회(運動會)와 더불어

      가장 추억(追憶)에 남는 대행사(大行事)였습니다.

 

      원족을 가는 날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엄마가 정성껏 싸주신 김밥과 과자와 사이다 등을 넣은 리꾸사꾸(작은 배낭)를

      둘러메고 신바람이 나서 집을 나섰습니다. 극성(極盛)스런 엄마들은 평소

      아끼던 비로도 한복(韓服)을 곱게 차려 입고, 양산(陽傘)을 바쳐 쓰고 따라

      나섰습니다. 선생님 도시락도 싸들고, 경우(境遇)에 따라서는 촌지(寸志)봉투도

      들고,’치맛바람’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나 봅니다.

 

      아이들 원족(遠足)에 엄마들만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모난 궤짝을

      둘러맨 아이스케키 장수, 조그만 손수레에 아이스크림 제조통을 매단 아이스크

      림 장수, 빙수와 냉차 장수, 솜사탕 장수, 또뽑기 장수, 요지경 아저씨, 등

      요즘으로 보면 불량식품(不良食品) 보급부대(普及部隊)가 열(列)을 맞추어 걸어

      가는 학생들과 엄마들 본대(本隊)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학교를 다녔으면 중, 고등학생이었을 아이스케키 장수 형들은 녹기 전에 빨리

      팔기 위하여 이렇게 반복(反復)해서 웨쳐댔습니다. "아이스 깨끼, 어름과자 !"

      "아이스 깨끼, 어름과자 !". 자꾸 들으면 이렇게 들렸습니다. "아이 새끼, 어른

      과자 !". 빨갛고 노란 색소(色素)로 물들인 고깔 콘에다가 현장(現場)에서 직접

      만든 서걱서걱한 아이스 크림을 주걱으로 퍼 담아 파는 아이스 크림 장수

      아저씨의 허스키한 호객(呼客) 목소리

      "아이스 쿠리~!". ------------- 그 때를 아십니까?

 

 

셋,  그레고리 펙, 커크 다그라스, 버트랑 카스타. 챨톤 헤스톤, 율브린너, 마론 브란

      도, 케리 쿠퍼, 죤 웨인, 안소니 퀸, 오손 웰스, 리차드 위드마크, 록 허드슨,

      로버트 테일러,제임스 딘, 진 시몬스, 오드리 햅번, 에리자베스 테일러, 마리린

      먼로, 라나 타나, 비비안 리, 데보라 카, 소피아 로렌,크리스티네 카푸만,

      지나로로 부리지다, 스잔 헤이워드 등 등 헤아릴 수 없이 명멸(明滅)하던 기라성

      (綺羅星)같은 미남미녀(美男美女) 은막(銀幕)의 스타들이 이제는 늙고 기운없는

      8, 90 노인(老人)이 되었거나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습니다.

 

      그들이 출연(出演)하는 영화(映畵)를 보고 울고 웃던 5, 60년대의 중,고딩들도

      지금은 5, 60대의 ’꼰대’가 되어 무대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처지(處地)가

      되었습니다. ’콘베아 벨트’에 실린 화물(貨物)처럼 어느누구도 종착역(終着驛)

      을 (向)하여 가는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 예외(例外)이거나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부영화(西部映畵)에서 인디언들이 부족원로(部族元老)들을 평소에

      극진(極盡)히 모시고, 위기상황(危機狀況)에서 원로들의 오랜 경험(經驗)에서

      우러나오는 지혜(智慧)의 자문(諮問)을 구(求)하는 장면(場面)을 종종 보았습니

      다. 이들에게서 배울 것은 배워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로 삼아야겠습니다.

 

 

넷,  지구 표면(表面)의 4분의 3이 바다이고 육지(陸地)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山 (8,848m)보다 마리아나 해구(海溝, 11,038m)가 더 깊습니다. 무인(無人)

      심해 잠수정(深海 潛水艇)의 발달로 마리아나 해구까지 도달(到達)하여

      조사해 보니 여기에도 갑각류(甲殼類) 등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다 밑으로 10m 내려갈 때마다 기압(氣壓)은 1기압씩 높아집니다. 수심(水深)

      이 1000m라면 100기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수복(潛水服)을 착용(着用)

      한 잠수부(潛水夫)이거나 과학자(科學者)가 탄 유인 잠수정(有人 潛水艇)이

      대왕오징어가 서식(棲息)하는 심해(深海)에서 살아있는 대왕오징어를 발견

      (發見)하거나 관찰(觀察)하는 일은 불가능(不可能)하다 할 수 있습니다.

 

      최근(最近)에 대왕오징어와 향유고래를 연구(硏究)하는 과학자(科學者)들은 

      향유고래의 등에 특수제작(特殊製作)된 비디오 카메라를 부착(附着)하여

      그들이 수심 3,000m의 바다속으로 들어가 활동하고 대왕오징어를 포식(捕食)

      하는 장면을 찍는데 성공(成功)했습니다. 저는 그 필름을 보았는데, 향유고래들

      이 어느 깊이에 도달(到達)하여서는 모두들 머리를 바다 밑으로 향하고 잠을

      자는 것같이 한동안 꼼짝도 안하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런 모습을 향유고래가 보이는 것은 잠을 자는게 아니라 아마도 향유고래가

      운기조식(運氣調息)하듯 큰 머리통 속에 꽉 찬 기름을 이용하여 부력(浮力)을

      조절(調節)하고, 기압(氣壓)의 변화(變化)에 적응(適應)하는 시간(時間)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섯, 소설(小說)이나 영화(映畵)에서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는 과장(誇張)된 모습

        으로 표현(表現)되어 우리 인류에게 흥미(興味)와 공포(恐怖)의 대상(對象)

        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의 노고(勞苦)로 이제는 어느정도 두 동물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解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정리해 보면, 깊은 바다 속에 대왕오징어가 살고 있지만

        큰 배를 공격할 정도로 크지는 않고 머리에서 다리 끝까지 10m~20m정도의

        크기이며, 향유고래가 수심3,000m 정도까지 잠수하였다가 다시 바다 표면

        (表面)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반면(反面) 대왕오징어는 자기가

        서식하는 깊이의 범위(範圍)를 벗어나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智慧)와 능력(能力)을 고루 갖춘 포유류(哺乳類)인 향유고래에게 두족류

        (頭足類)인 대왕오징어는 적수(敵手)가 되지 못하고 향유고래에게 잡혀 먹히

        고 맙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문화(文化)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파(傳播)됩니다. 향유고래에게서 환경(環境)의 변화에 적응

       하고  적(敵)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비축(備蓄)하는 유비무환

       (有備無患)의 정신(精神)을 배워야할 때입니다.

 

 

 

 

                                                 

                                                         -  끝 -

 

 

 

 

 

가을의 속삭임 ㅣ펌
 
신희상
 
 
출처;야후블로그<이브의 행복으로 가는 낙원>

 

 

 

 
배봉균( (2006/10/11) : baeyo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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