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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구원이 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21 조회수640 추천수5 반대(0) 신고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구원이 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10)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여는 일이란 그리 큰 사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상 밖에 큰일이 벌어지면 놀라기만 할 뿐이지 다가가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서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커피 취향을 알아서 설탕과 밀크를 배합해주거나, 갑자기 비 내리는 날 우산을 빌려 주는 등 사소한 일이 더 감동을 준다고 합니다. 그 안에 평소에 자신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고받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서로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캐오가 나무에 올라간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그리움이 배어 있습니다. 솔직한 마음이 다 들어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꼭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미 몇몇 세리들과 식사를 했다는 소문도 들은 터였습니다. 무언가 훌륭한 말씀을 한 자락이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사실 자캐오 정도의 세력과 재력이 있는 세관장이라면 개별적으로 사람을 시켜 만나 뵙자는 청을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복음서에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손을 잡고 나무에 오를 만큼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천주교 교우들은 가끔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기쁨이 적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따끔한 충고도 받습니다.

  저도 집사람에게서 “당신은 어떻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무룩하니 무표정이 되가느냐?” 핀잔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우스개 소리로 그게 포커페이스이지 어떻게 무표정이냐고 반박해 봅니다. 속으로는 “그게 다 요새 사는 게 즐거운 일이 없어서 그래요”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이러저러한 바가지 긁는 소리 밖에 나올 게 없을 것 같아 쓴 미소만 짓습니다.

  나름대로 미사참례도 열심히 하고 묵상도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제 얼굴에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 행복하고 기쁜 표정보다는 심각한 표정을 더 자주 지었나 봅니다. 산다는 게 다 그렇지 않느냐는 핑계를 댑니다만 작은 행복과 기쁨에 감사하기보다 더 큰 자극을 주는 기쁨을 바라지 않았나하고 반성해 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로또에 일등 당첨이 되어도 기쁜 표정 짓는 대신 어떻게 축 안내고 관리하나하고 걱정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표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감추어 관리된 표정을 짓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 어려워 졌기 때문입니다. 아닌 척을 해야 능력 있는 사람이고 속이 깊다는 칭찬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보니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부모님의 병환, 자식들의 진학문제, 경제적 난관 등등 어느 하나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으니 얼굴이 심각해 졌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그러더군요. 당신이 밥을 굶느냐, 어디 중병에 들었냐? 자식들 멀쩡하니 잘 있고, 집 있고 여우같은 마누라 있으면 됐지 당신보다 더 한 사람들도 다 잘 견디며 살지 않느냐고 해댑니다. 당신이 겪는 어려움만큼 남들도 다 겪으며 살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래도 성당에서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주시지 않았느냐하고 말합니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며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기쁨도 날이 갈수록 중독이 되는지 자지잔 기쁨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고 더 큰 기쁨만 찾게 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카피문구를 외우고 다녔으나 대학시험을 앞두고는 그런 생각이 사치처럼 여겨집니다. 남의 집 전세 살 때 얼른 집장만해서 독립하자고 다짐했고 드디어 집을 사게 됐을 때 느꼈던 흥분이 가셔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히려 벼락같이 오른 집값에 이사도 못하고 애들은 어떻게 장가보내나 하는 걱정만 앞서게 됩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유대인들에게서 원수들과 내통했다고 배반자 소리를 들어가며 살았습니다. 아마 그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을 겁니다. 갖은 모욕을 참아내느냐고 가시방석에서 사는 느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키 작다고 놀림 당했을 겁니다. 이런 그가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라는 분을 뵙기 위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게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얼굴 표정의 변화는 거짓말 탐지기가 놓치는 미세한 변화도 잡아낸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분노, 공포, 비웃음, 화 등등이 모두 얼굴 근육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표정을 읽힐까봐 애써 감춘다고 합니다. 요사이 제가 그렇게 행동했나 봅니다. 오늘 자캐오가 보인 행동은 얼굴에서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드러난 기쁨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그 행동에 기쁨과 행복이 어려 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온몸으로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는 연습해야하겠습니다. 그 안에 구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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