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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괴짜수녀일기] 여형이의 분홍색 원피스 /이호자 수녀님<18>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25 조회수680 추천수7 반대(0) 신고
 

                  여형이의 분홍색 원피스



   내 제자 가운데 영형이만큼 깜찍한 애도 드물다. 또한 여형이만큼 나를 지독히 좋아하는 애도 드물다. 그런가 하면 여형이 만큼 나한테 많이 혼난 애도 드물다.


    여형이가 네 살 때 처음 만났던가? 머리도 영리했지만 얼마나 흥분을 잘 하는지 좋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흥분파였다. 여형이는 아기 때 청각을 잃는 바람에 심한 난청이 되어 항상 발음이 문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공부할 때마다 혼이 나야 했다. 그래도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울면서도 다가앉아 발음교정을 받은 정도로 적극적이고 승부욕도 강한 애였다. 여형이 어머니는 아이가 혼나고 간 그 이튿날 등교할 적엔 반드시 꽃을 한 아름 안겨 보낼 만큼 센스를 가진, 미술을 전공한 멋쟁이였다.


   여형이 와의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 오늘은 여형이의 원피스 이아기를 하려고 한다. 한번은 발음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코맹맹이 소리를 내서 나는 여형이의 코를 꽉 쥐어 비틀었다. 내가 너무 힘을 주었나? 난데없이 코피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그날 처음 입고 온 분홍색 원피스에 코피가 떨어져 빨갛게 얼룩이 진 것이었다. 아빠가 외국 출장 갔다 오며 사왔다고 자랑하던 앙증맞을 정도로 예쁜 원피스였는데….


   난감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얼른 옷을 벗겨 빠는 일이었다. 여형이 어머니가 알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그 옷을 강력표백제에 담글 게 뭐람. 옷의 색깔이 빠지며 코피자국과 함께 범벅이 되어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날염(捺染) 기법을 이용한 추상화라고나 할까. 하여튼 좋게 말하면 그랬다. 내가 선풍기 바람 앞에서 젖은 옷을 말리는 동안 여형이는 앉아서 칭얼칭얼 울고 있었다. 그날 교문을 나서는 여형이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미안하고 낭패스러웠는지….


   여형이네는 학교 근처에 살았다. 아이 때문에 일부러 학교근처로 이사를 온 것이다. 언젠가 그 집에 들렀더니 어느 바닷가에서 주워온 옥돌이면서 작고 예쁜 색 자갈을 한웅큼 쥐어 주었다. 그날 오후 내가 수녀원에서 쉬고 있는데 대문이 덜커덩거리기에 얼른 나가보니 막 대문 밑 틈 사이로 작은 손 하나가 들어와 예쁜 돌을 바닥에 놓는 게 아닌가. 여형이 였다. 아까 내가 돌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가 엄마 몰래 한웅큼 쥐고 온 것이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갸륵한 여형이. 대문은 안 열리고 말도 못 하니까 대문을 흔들다가 할 수 없이 놓고 가려는 참이었다.


   지금 여형이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애화학교 유치원 때의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일류 미술대학에 합격하는 게 소원이라는 여형이. 그래서 나를 더없이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 애의 소원을 하느님은 들어주실는지.


     - 이호자 마지아 수녀(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前 애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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