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우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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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6-11-28 | 조회수870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우십시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루카 21, 6-10) 하느님을 경배하려고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제는 그 겉모습만 화려하고 그 본래 정신은 사라졌습니다. 장사치들만 들끓는 강도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 내지르는 목소리를 번번이 묵살하였습니다. 한번 비틀어진 방향은 세월이 갈수록 어긋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눈에는 화려하게 꾸민 겉모습에 속아 이것저것 가져다 바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도자들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어린양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비록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 들어난 외모에 현혹되어 그 진실에 눈감아 버리는 것도 커다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백성들에게 성전이 허물어져 폐허처럼 될 것이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속으로 깊은 연민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다 잃지 않으시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겪어야할 고난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바다위에 부는 바람도 돛이 그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배가 앞으로 나갈 수도, 침몰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어떤 이는 그것을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으나 어떤 이는 거기에 매어 영영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힘들다고 계속해서 알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째든 한번은 꼭 알을 깨고 나와야만 새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도 어쩌면 우리가 알을 깨고 새 세상으로 나가는 길인지 모릅니다. 당장 매 맞는 것이 두렵다고 와야 할 것을 물리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종말이 주는 두려움에 휩싸여 우리가 지켜야할 바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종말에 느낄 고통과 공포와 슬픔과 두려움을 겪어 주셨습니다. 인간들 보러 너희는 인간이니 그 모든 고난을 겪어야하고, 당신은 신이니까 그 고난을 겪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기조차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기에 이 성스런 도성에 들어오실 때 가슴이 뭉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도성의 운명을 생각하시니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닥쳐올 종말 때에 두려워 발버둥치기보다, 그리하여 눈이 어두워져 헛것에다 제 목숨을 맡기기보다, 예수님처럼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삶이 짓 누르는 고통에 힘들어하고 질병으로 괴로움을 겪는다면 실껏 우십시오. 울고 싶을 때는 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정화가 일어나야만 모든 현상 안 깊숙이 감추어진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만 칭찬을 일삼는 세태 속에서 자칫하다가는 마음으로 보는 눈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사람은 어떤 고난과 종말 유혹이 닥쳐도 그는 주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방법을 꼽아 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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