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
적극적이고도 풍성한 결실을 맺는 미사 참례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셨다" (갈라티아 2,20)
미사 성제의 무한한 위대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예수님의 희생 제사에 주의깊게 그리고 신심깊게 참례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미사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들은 무엇보다도 흠숭, 사랑, 그리고 통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하여 인용된 교황 비오 12세의 매우 감동적인 묵상이 있다. 교황께서는 미사 성제에 참례할 때의 우리의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이신 구속자(救贖者)께서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셨을 때 가지셨던 마음 자세입니다. 즉 순종하는 겸손의 정신이며,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흠숭과 사랑과 찬미와 감사의 정신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희생 제물이 되는 정신, 자기 부정의 정신을 우리들 안에 재현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우리 스스로가 원하여 참회와 통회와 우리 죄에 대한 보속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드리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심각하게 물어보자.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미사 성제에 참례하고 있는가?"
십자고상과 양초들
미사 성제에의 진실되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희생 제물이 된다. 이러한 참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해주며" (비오 12세),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그분의 동료가 되게 해주며," 또한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합치하게끔" (필립피 3,10) 해주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례 의식이며, 가미(加味)된 형식이다.
대성인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제대 위에서의 희생은 우리 자신이 희생 제물화될 때에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로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이 도리에 대한 묵상으로서, 초대의 크리스챤 공동체들에서는 신자들이 통희의 의상을 입고 성인 도문을 노래하면서 교황께서 주례하시는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대를 향하여 행렬지어 갔다. 우리들도 이러한 정신으로 미사에 간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 토마스 사도의 말에 동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가서 그분과 함께 죽자." (요한 11,16)
성녀 말가리따 마리아 알라꼭이 미사에 가서 제대 쪽을 바라볼 때, 그녀는 꼭 십자고상과 양초를 보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신의 정신과 마음에 두 가지를 새겨두기 위해서였다. 십자고상은 예수님께서 그녀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나게 해주었으며, 불켜진 양초들은 그녀가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나게 해주었다. 즉, 자신을 희생하고 예수님과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태우는 것이었다.
프랑스 국왕 성 루이 9세는 매일 맨 마루바닥에 꿇어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한 번은 시종이 장궤틀을 드리니까, 왕은 그에게 말했다. "미사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희생하실 때에는 왕들은 마루에 꿇어야 한다."
성 요한 보스꼬는 젊은 이들이 뽀르 모리스의 성 레오나르도의 방법을 본받아서 미사 성제에 참례할 것을 권했다. 성 레오나르도는 미사 성제의 제사 부분을 셋으로 나누어서 묵상했다. 첫째, 봉헌 기도로부터 거양 성체까지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묵상한다. 둘째, 영성체 때까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원인인 우리의 죄들에 대해 생각한다. 셋째, 영성체부터 미사 끝까지는 정결하고 열절한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이 방법을 가장 간단하고 가장 결실있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제대에서 미사드리는 사제를 정신차려서 따라가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심이나 지루함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퐁갈랑의 귀도(Guido of Fontgalland)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미사 참례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거룩한 젊은이는 대답했다. "거룩한 미사 중에 우리가 해야 되는 유일한 일은 미사드리는 사제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제대에서 사제가 드리시는 기도를 따라 드리면 됩니다. . ."
성 비오 10세 교황도 미사 때 무슨 기도를 바쳐야 되는지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 "미사를 따르십시오. 미사 경문의 기도를 드리십시오."라고 대답하셨다.
갈바리아 산의 성모님을 따르라
미사 성제를 어떻게 참례해야 되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모범은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가장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경건한 부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요한 19,25).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은 갈바리아 산 위에 서있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젊은 이들에게 간단하면서도 감명 깊은 말씀을 해주셨다. "미사에 가는 것은 우리의 구속자(救贖者)이신 그분을 만나러 갈바리아에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의 사랑과 슬픔의 만남, 바로 이것이 미사 성제에의 참여이다.
아벨리노의 성 안드레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와 예수님의 수난과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루는 삐에뜨렐치나의 비오 신부님께 한 명의 영적인 아들이 물었다. "신부님, 우리는 어떻게 미사 성제에 참례해야 합니까?" 신부님은 대답하셨다. "갈바리아 산에 계셨던 성모님처럼, 성 요한과 거룩한 여인들처럼, 사랑과 연민(憐憫)의 정으로." 그의 영적 자녀들 중의 한 사람의 미사 경본에 비오 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해주었다. "미사 성제에 참례할 때에는 너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신비에 대하여 열심히 정신을 집중하여라. 즉 너의 영혼을 구속(救贖)하고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신비이다." 또 한 번은 비오 신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왜 미사 중에 우십니까?" 비오 신부는 "나의 딸아, 제대에서 일어나는 그 일에 비하여 몇 방울의 눈물이 무엇이냐? 억수와 같은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지 않으냐!"라고 대답하였다. 누군가가 신부에게 또 말했다. "신부님, 미사 때 피나는 발로 계속 서계시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비오 신부는 "미사 때 나는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답인가! "나는 달려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있다,"라는 뜻이다. 바로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갈라티아 2,19). 미사 성제에의 진정하고도 충만한 참례는 이론적이고 허황되고 허세부 리는 참례와는 구별된다.
성 분도의 생애에 아름답고도 짦은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미사 성제에 참례하고 있었는데, "이는 내 몸이니라."라는 말씀이 외워지자 말자 성 분도 원장은 방금 축성된 성체로부터 음성을 들었다. "또한 너의 몸이니라, 분도야!" 미사 성제에의 참다운 참여는 우리를 하느님이시면서 희생 제물이 되신 분과 함께 희생 제물 즉 면병이 되게 해준다.
성녀 벨라데따 수비루는 새로 서품된 사제에게 작은 지혜의 말을 건네주었다. "제대 앞에 서계시는 사제는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해주십시오." 알깐따라의 성 베드루는 미사 전에 제의를 입으면서 갈바리아 산에 오르려는 듯한 마음을 가졌다. 사실 사제의 제의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상징하는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비오 신부의 미사에 참례한 이들은 신부님의 뜨거운 눈물을 기억할 것이다. 신부님께서 미사 성제에 참례한 모든 이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간절히 부탁하시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전례가 조용한 감동 속에서 전개됨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비오 신부께서 성체 축성의 단어들을 매우 힘들게 발음하시면서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무거운 고통의 표정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비오 신부께서 한 시간 이상 조용히 묵주 신공을 계속해서 바치실 때 성당 안에 있는 신자들이 엄숙하고도 감동스럽게 침묵지키는 것을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오 신부께서 미사드리는 동안 슬픔의 감정에 잠겼던 것은 다른 성인들과도 비슷하다. 그의 눈물은 가끔 피눈물까지를 흘렸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성 원선시오 페레르, 성 이냐시오, 성 필립 네리, 가끔 손수건이 푹 젖도록 눈물을 흘렸던 브린디시의 성 로렌죠,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 꾸뻬르띠노의 성 요셉, 성 알퐁소, 성녀 젬마 갈가니...등의 눈물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는 앞에서 무감각하게 있는 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잠들었던 사도들과 같이 하지 말며, 단말마의 고통을 받으시는 예수님께 무관심하면서 십자가 밑에서 주사위나 던졌던 군인들과 같이 해서도 안되겠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적이고 저속한 음악을 기타 반주에 맞추어서 부르며, 여자들은 노출되는 옷을 입고, 젊은 이들은 이상한 유행의 장식을 하고서 미사에 참례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성 요한 보스꼬 역시 많은 신자들이 성당 안에서 미사에 정신을 두지 않고 의도적으로 분심을 가지며, 여기 저기를 쳐다보며, 성모님이나 사도 요한처럼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행동하는 데 대하여 슬픔을 표시했다.
우리는 이제 성모님과 성인들을 바라보며 그분들을 본받도록 하자. 그분들을 따라가는 것만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1코린토1,21) 올바른 길이다.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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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모든 가족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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