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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탄생 500 주년 - 류해욱 신부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05 조회수685 추천수6 반대(0) 신고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탄생 500 주년



  오늘은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맞는 단순한 축일이 아니라 탄생 500주년을 맞는 특별한 날입니다. 그의 탄생지 스페인에서는 연일 대대적인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세계 도처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은 조용히 오늘을 맞고 있습니다. 저도 거창한 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오늘 아침 대화중에 어느 예수회원도 오늘이 하비에르 탄생 500주년이 되는 날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랐습니다. 다른 교구 신부님이 “예수회가 바쁜가 보지요?”라고 하여 함께 웃었지만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라고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가 법석을 떨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한국예수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도 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500주년을 너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탄생 500주년을 맞으며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용히 돌아보고 예수회원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열정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를 소개합니다. 성 이냐시오의 첫 동료의 한 사람인 하비에르라는 인물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호칭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광막한 동방의 대지를 달렸던 선구자인가요?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거친 바다를 건너는 목숨을 걸었던 모험가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지녔던 사도인가요? 미지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선교사인가요? 이 모두이면서도 그 어느 호칭도 그를 표현하기에는 뭔가 미진한, 채워지지 않은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회원이었고, 파견 받은 자로서의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수도회, 예수회의 회원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그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호칭이 있다면, 오직 예수회원이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회원이라는 호칭이 다른 호칭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도, 예수회원으로서의 어줍잖은 자부심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예수회원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를 진정한 예수회원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의 탄생 500 주년을 맞으며, 그가 선구자로서, 사도로서, 선교사로서, 무엇보다 예수회원으로서 광막한 미지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걸었던 그의 삶의 여정을 따라 더듬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제 나름대로 그의 전교 여행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가 포르투갈 리스본을 떠나 인도 고아(Goa)에 도착한 것은 항해 13개월만인 1542년 5월 6일이었습니다. 고아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했던 일은 크게 다섯 가지, 병원 사목, 병원 밖의 환자 사목, 아이들에 대한 교육 사목, 죄수들에 대한 사목, 그리고 설교였으니, 그것이 앞날의 예수회 사도직의 전형적인 모델이 됩니다.

  그는 고아에서만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잠 잘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에 대한 계획은 더 원대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그의 시야는 더 멀리 더 넓게 펼쳐 있었으니, 그는 고아에서의 사목에 머물지 않고 미지의 땅을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영원한 방랑객이 됩니다.


  그의 전교 여행은 크게 나누면, 4차 전교 여행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3차 전교 여행과 비교할 수 있겠지요.) 제 1차 여행은 인도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한 전교, 제 2차 여행은 남태평양 말라카 (Malacca)와 몰루카(Molucca)에서의 전교, 제 3차 여행은 일본 전교, 제 4차 여행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샹촨 (Sancian)섬에서 끝난 중국 전교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그의 전기를 읽고 지도에 각기 다른 색으로 칠을 하면서 전교 여행지를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조선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요! 이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제 1차전도 여행은 코모린 곶(Cape Comorin)과 진주잡이(The Pearl-Fisher)라 불리는 해변을 따라 펼쳐진 트라벤코르 (Travancore)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부 인도 전역이었습니다. 타는 듯한 더위와 언어 장벽을 뚫고 낯선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손을 뻗쳤을 때, 그가 거두는 놀라운 결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었지만 진리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땅에 열정에 넘친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의 설교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으니, 트라벤코르 지방에서 단 한 달 사이에 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러나 선구자들의 삶이 늘 그러하듯 그에게 기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1545년에 겪어야 했던 현실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른 종족들이 그의 전교지역에 침입, 학살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중재하기도 했으나 마나르(Manar)섬에서는 한 지방 족장에게 600여 명의 새로운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후, 그는 코친(Cochin)에서 다시 고아로, 고아에서 바씬(Basscin)으로, 거기서 네가푸탄(Nagapatan)으로 등 여러 지역으로 전교지역을 옮기며 광활한 인도의 평원을 가로질러 해안 끝 작은 마을까지 두루 다녔습니다.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병자들 앞에서 복음서를 읽는 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되었지만, 그런 중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외 세례를 주는 일, 기도드리는 일, 질문에 답하는 일 등 끝없는 일 가운데서 그는 이냐시오의 관대함을 구하는 기도에서처럼 휴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동료 예수회원들을 그리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예수회원으로서의 동료들과의 일치와 연대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으니, 그는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 “여기서의 제 휴식은 끊임없이 당신들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끊임없이 새롭게 응답하면서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새로운 미지의 섬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프란치스꼬 하비에르는 1545년 9월 말레이(Malay)반도에 있는 말라카로 향했으니 장장 2000 여 마일에 이르는 그의 제 2차전도 여행의 서막이었습니다. 말라카에서는 약 4개월간 머물면서 그곳의 원주민들 뿐 만 아니라 본국 식민주의자들의 회심을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낮에는 고백성사를 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어 거의 단식하다시피 했고, 밤에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1546년 1월, 그는 다시 남태평양의 몰루카로 가서 약 1년 반을 머물며 암보이나(Amboina)를 중심으로 한 여러 미지의 섬들을 다니며 전교했는데 말레이어로 성가를 부르며 원주민들을 매료시키기도 합니다.

  약 3개월 동안은 식인종이 산다고 알려져 포르투갈 식민당국에서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던 모로(Moro)섬에 가서 그 곳의 미개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체험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는 그곳을 식인종의 모로 섬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의 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그곳 섬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저 미소를 짓고 덥석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에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과 행동으로 족했던 것이지요. 1547년 4월, 그는 다시 말라카로 돌아와서 그곳에 있던 세 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말라카 교회의 기반을 닦는데 몇 개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일본인 야지로(Yajiro)를 만나 일본 전도를 계획하고 인도로 돌아옵니다.

  인도에 돌아온 하비에르는 15개월간 고아와 실론(Ceylon)과 코모린 곶을 왕래하면서 전교지의 기반을 튼튼히 닦으며 일본에 들어갈 준비를 했습니다. 154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야지로를 비롯한 일본인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일본 전교를 꿈꾸며, 머릿속에는 말로만 듣던 이상적인 신비의 나라 일본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1549년 4월 15일 하비에르는 코스모 데 토레스(Cosmo de Torres)신부와 쥬안 페르나데즈(Juan Fernandez)수사와 그가 영세를 준 세 일본인 신자와 함께 드디어 고아를 출발하여 일본을 향했으니, 제 3차전도 여행이었습니다. 4개월의 힘든 여행을 한 후 큐슈(Kyushu)의 가고시마(Kagoshima)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 동안 전교하며 열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진리를 외쳤지만 겨우 몇 십 명 정도의 신자를 얻게 됩니다. 한 달 사이에 만 명에게 세례를 주던 인도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보다 효율적인 전교를 위해 그가 세웠던 계획은 일본의 왕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준비로 그는 일본의 고유한 풍속과 예법을 익히고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왕은 그가 상상했던 절대 군주적 권력을 행사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포르투갈의 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으며, 일본인들도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그가 이상으로 그리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를 걸었던 대학이라는 곳도 권력층의 자제들을 모아놓은 사원에 불과하여 그는 적지 않은 실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왕을 만나러 미야코에 간 그는 초라한 행색으로 대궐 문 앞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왕보다 다이묘오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장 강력한 다이묘오가 사는 야마구치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방법을 바꾸어, 교황 대사의 자격으로 고관의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고 다이묘오에게 가서 선물을 주면서 신임을 얻게 됩니다. 그는 야마구치의 다이묘오에게서 전교할 권리와 거처하면서 방문객을 맞을 절간도 하나 받게 되었지만, 일본은 이전 전교지와는 달리, 복음이 스며들기에는 너무나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두 달 동안 전교했지만 단 한 사람의 신자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온갖 수모와 경멸을 받으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전교하는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차차 세례를 청하게 되어 이년 후, 그가 떠나올 때는 약 오백 명의 신자가 생겨났습니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후, 1551년 11월 일본 교회를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드즈 수사에게 맡겨두고 그는 인도로 다시 돌아옵니다.


  인도에 돌아온 그는 이미 이년 전에 그가 동방의 지부장으로 임명을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앞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그의 시야는 더 먼 곳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온갖 신비의 나라, 중국에의 선교가 그것이었습니다. 1552년 4월 17일, 그는 중국을 들어가기 위해 다시 고아 항을 출발하게 되니, 미완성으로 끝난 그의 제 4차전도 여행이었습니다. 중국 대륙을 들어가기 위해 전초기지로서 그가 도착한 곳은 상촨(Sancian)이라는 섬이었습니다. 상촨에 도착한 그는 작은 성당을 세우고 환자를 방문하고 고백성사를 주는 등의 전교를 하며 중국에 들어갈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그가 계획했던 일을 성취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뜻에 온전히 맡김으로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으니,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46세의 나이로 중국 선교를 눈앞에 두고, 하비에르는 그가 그리던 영원한 생명으로 간 것입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안토니오에 의하면, 그는 의식의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회의 형제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였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안토니오가 이제 하비에르가 숨을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그의 손에 초를 쥐어 주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고 합니다.

  사부 이냐시오의 편지를 받으면, 이냐시오가 있는 로마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던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사부 이냐시오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당신’이라고 불렀던 그는 1622년 3월 12일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됨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영원한 동반자가 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교여행을 간략히 더듬어 보면서 제가 갖게 되는 느낌은 그가 얼마나 철저히 예수회원으로 살았는가에 대한 경이입니다. 예수회원의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는 융통성입니다. 복음이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정신, 바위처럼 강하되 물처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식인종이 산다는 모로 섬을 향해 떠나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을 모험을 해야 함을 알았기에 두려움 없이 그곳에 갔고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들처럼 벌거벗고 함께 춤추던 던 하비에르. 그가 일본의 다이묘오를 만나기 위해서는 누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고관의 옷으로 갈아입고 위엄을 갖추고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상황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예수회원으로서의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고 했듯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진정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다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유로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들 당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으시면서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고 하신 주님을 본받아 하비에르는 다음 동네로, 다음 지역으로, 다음 나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지의 땅에서 그가 당했던 어려움과 위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회원으로서의 그의 동료들과의 깊은 일치와 연대였습니다. 그는 “저는 당신들의 우정과 도움 안에서 살며, 영혼과 육체의 숱한 시련 속에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들이 보낸 편지에서 이름을 오려 제 서원문과 함께 가지고 다니며, 바로 거기에서 위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모험의 원천은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의탁, 그리고 동료 예수회 형제들에 대한 깊은 일치에서 오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탄생 500 주년 대축일을 맞으며 저희 예수회원들이 참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느님께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자유와,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같은 영성을 살려는 회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치라는 것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거기에 많은 은인들의 기도와 성원이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저희 예수회원들이 오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탄생 500주년을 맞으면서 큰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겠지요. 저희가 성인이 지녔던 열정과 동료들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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