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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옮겨온 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05 조회수913 추천수10 반대(0) 신고

12월5일 대림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루카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 다.”

 

  예전에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하는 일이 달라서 한 친구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한 친구는 도시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돈도 많이 벌고 공부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도 둘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였고, 가장 친한 친구로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형제와 같은 사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둘이 결혼해서 동시에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두 사람은 자기 자식을 직접 잘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나서 도시의 친구가 그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3년만 서로 바꾸어서 맡아  자신의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자, 그 동안은 서로 죽을 일이 있을 때까지는 서로 간섭도 하지말고 만나지도 말자, 그래서 아이들을 제대로 한 번 키워보자.” 아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정말 아들을 바꾸어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방법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도 부모의 교육방법에 선선히 응했습니다.

 

  도시에 사는 친구는 농촌에서 올라온 친구의 아들을 아주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호강을 시켰습니다.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고, 독선생도 들어앉히고, 좋은 옷으로 입혀 주었습니다. 그 부부는 항상 아이의 건강도 걱정하였고, 좋은 장난감도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농촌에서 온 아이는 몰라보게 도시에 적응해 나갔고 약속한 3년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친구는 3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시골에 내려오면서 자기가 그렇게 최선을 다한것 처럼 자기 자식도 엄청나게 대접을 받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자기 자식이 소꼴을 잔뜩 베어가지고 식식거리며 오는데 형색을 보니 옷은 아주 낡아 헤어지고 신발도 엉망이고, 뽀얗던 얼굴은 검게 변하고 도저히 봐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화를 버럭 내면서 “나는 네 자식을 아주 곱게 길렀는데 너는 내자식을 이렇게 고생을 시켰다. 너한테 자식을 맡긴 내가 바보 같고 너는 믿을 놈이 못된다.”고 의절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자 멍하니 서있는 친구와 친구의 아이를 뒤로하고 아이를 데리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도시에 온 아들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단정하게 앉아서 기도하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밥도 잘 먹고는 책상에 앉아 혼자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 인사하고, 아침에 깨우기도 전에 스스로 일찍 일어나서 제 방을 청소하고,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렇게 아주 잘 사는 것입니다. 사흘이 되기도 전에 도시의 친구는 시골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나는 자네의 아들을 손님으로 생각했다네, 그리고 자네 아들을 망쳐 놓았다네, 아들을 잘 가르쳐 준 자네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마음 상하게 한 나를 용서해 주게!”시골의 친구는 그냥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친구여, 나는 친구의 아들을 내 아들로 생각하고 산 것 뿐이라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고 세상의 물리(物理)가 가르쳐 준 것이라네.”

 

   자연 만물을 통해서 모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스스로 깨닫고 공부하는 것은 세상의 문리를 터득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아이들을 교육할 때 세상의 물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억지로 주입하고 있기에 교육이 점점 피폐해져 가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세상의 물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지식과 주입된 교육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고 강제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리는 하느님의 법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간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세상의 물리를 터득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물리를 깨우칠 수 없고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대전교구의 유흥식 나자로 교구장 주교님은 2007년도 사목교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때에 이 세상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은 이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하늘의 지혜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마태 5,3-12 참조). 내 것을 사랑으로 나누는 마음이 있을 때, 이웃의 아픔에 연민을 가질 때, 주어진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대로 실행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예언자들과 왕들과 스승들이 그렇게 듣고 배우고 보고 알려고 하였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수줍어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부에 그것을 억눌러 두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고통스럽도록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통로여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럽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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