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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도(?) 가 따로 없다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김정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05 조회수841 추천수4 반대(0) 신고

해마다 사제 수품 기념일이 돌아오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수품식 때 입었던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한다. 그런데 내 제의는 처음부터 워낙 낡았던 것이라 색도 크게 바랜 지 이미 오래고

모양도 구식이어서 어디 던져놔도 누구 한 사람 거둘떠보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제의다

 

1981년 12월, 사제 수품식을 한 달여 남겨놓고 있을 때였다. 성작(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은

이미 수도원에서 헌 것을 얻어 도금을 해둔 상태였고, 상본도 골라 인쇄작업을 시키는 등

이것저것 바쁘게 준비하면서도 막상 수품식 때 입을 제의만은 새것으로 맞추지를 않고

은근히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품식 때 제의를 입지 않고 열심히 사셨던 선배 사제들의 제의를 입고 싶었는데,

그때 광주 카톨릭대학교는 예수회의 신부님들이 개교 때부터 계셨기 때문에 제의방 창고에는

수도회 신부님들의 헌 제의가 많았으며 그 중에는 내가 욕심을 내고 싶은 붉은 색 제의가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의 풋 열심으로 순교를 원했던 나는 또, 수품식 때 붉은 색 제의를 입고 싶었는데 마침 색이 바랜 채

무늬도 긁은 선 하나만 위에서 아래로 그어져있고 뒤에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긁은 선 하나에

가슴에서 옆으로 올라가는 사선이 두 개 있는 고물 제의가 너무도  맘에 들었다.

 

학교 물품을 관리하는 사무처장 신부님을 찾아가서 창고에 보관중인 제의를 하나 갖고 싶다고 청했더니,

자색으로 된 새 제의를 대신 하나 사다놓고 헌 제의를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영대(제의를 입기 전에 목에 걸치는 띠 ) 도 없고 목둘레에는 때 자국까지 험하게 있는

제의를 받아들고 세상을 다 얻은 줄 알았다.

 

아마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쓰던 제의가 돌고 돌아서 광주 신학교까지 온 것 같은데, 제작 년도를 계산하면

그때 당시만 해도 50 년은 족히 넘었을 낡은 제의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게 너무 좋아서 내가 직접 동정을

사다 달고 영대는 다른 것으로 대체를 하고 나니, 마치 옛날 신부님들의 성덕을 내가 다 차지한 것 같았다.

 

드이어 수품날이었다. 새 신부는 일반적으로 흰색 제의를 입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는데 머리까지 벗겨진

 새 사제가 붉은 제의를 입고 갑자기 등장하자 선배 신부님들뿐만 아니라 신자들까지도 눈들을 둥그렇게 뜨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비록 순교를 원했던 내 뜻은 아무도 짐작못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그게 너무

 자랑 스러웠다.

 

그로부터 어언 25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순교가 아니라 독선과 아집의 길만 걸어온 느낌이 없지

않으나 뒤를 돌아다보니 감회가 크다. 그런데 은혜를 감사해야할 시기에 갑자기 가슴 저 밑바닥으로 부터

 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니, 어치피 입지도 못하고 버릴 제의를 가지고 새 제의로 사다놓고

바꿔가라니, 그렇게 고마웠던 사무처장 신부에 대해 느닷없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천하에 날강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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