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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몸에 밴 작은 사랑의 실천.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06 조회수795 추천수9 반대(0) 신고

 

 

<몸에 밴 작은 사랑의 실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마태 15,29-37)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책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달라이 라마’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특이 했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서 달라이 라마 초청 강연회 초대장이 배달되어 왔는데, 자기는 종교도 다르고, 또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참석을 망설이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초청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에 걸려 참석했습니다. 우연히 달라이 라마와 마주치게 되어 그분과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가 떨어지며 종이 몇 장이 바닥에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거의 순간적으로 허리를 굽혀 종이 서류 몇 장을 주워주며  “저도 자주 물건을 떨어뜨린답니다.”라고 하면서 눈인사를 하시는데 안경너머 그분의 눈에서 맑은 호수 같은 평화가 느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 눈길을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적어 놓습니다.


  영문학자이며 수필가인 장영희 교수는 소아마비로 양다리가 불편하여 목발에 의지하여 걷는다고 합니다. 그녀가 쓴 수필 책에 ‘하면 된다?’ 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홀스또메르’ 라는 연극을 지하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계단이 많은 통로에서 힘들게 올라오려는데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배우 유인촌 씨가 층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더니 등을 내밀어 들쳐 업고는 밖에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행동이 한번 베풀어지는 치기어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자는 알았기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어느 수도회 소속 사제는 수도회에서 피정 때 의무적으로 거치는 무전여행에 대해 말합니다. 수련기 피정 마지막 일주일간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나는  구걸여행이었다고 말합니다. 몇 끼를 쫄쫄 굶어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었을 때, 무작정 찾아 들어간 어느 시골 집 할머니께서 주시던 개떡이 그렇게 달고 맛있었다고 합니다. 평생 그 맛을 못 잊어 때마다 그 할머님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할머님이 잘 견디며 하느님께 봉헌하시라는 부탁 말씀에 수도 사제 생활의 어려움을 견딘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 커다란 기적에 눈이 더 쏠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들이 모두 군중이 가엽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 친지들이 아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들쳐 메고 업고 예수님 발치에 모였습니다. 또 그들이 사흘이나 제대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지닌 모든 고난과 배고픔을 다 아셨습니다. 사랑을 지니셨고 또 그 고난을 직접 겪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어려움을 미리 살펴 배려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지닌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나눈다면 모든 사람들이 흡족하게 먹고도 더 많이 넘칠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감동받는 것은 그들이 베푸는 커다란 선물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지니고 사는 사랑의 자세를 발견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는 처음 경험되지만, 그가 베푸는 작은 행동을 통해 사랑이라는 큰 물줄기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감사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 발견된다는 희망 때문이며, 그로인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베푸는 사소한  행동이 내게는 삶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교수는 그 글 모두에서 ‘하면 된다!' 는 말이 지닌 모순을 지적합니다. 층계하나를 못 올라가는 휠체어 장애인들에게는 “당신은 할 수 있소”하고 아무리 외쳐도 그가 벌떡 일어나 걸어 올라갈 리 만무하다고 씁니다. 그 말 뒤에는 자신이 지녔던 사회적 굴레를 그렇게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 말미에서 제자가 선물로 주었고 ‘하면 된다!’고 쓰인 그 자갈돌을 버리지 않고 책상위에 놓아두었다고 씁니다. 바로 한 배우가 보여준 작은 사랑의 실천에서 그녀는 삶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몸에 밴 작은 사랑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듣는 하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1악장 All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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