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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사, 제물, 봉헌(구약,신약)
작성자이종삼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09 조회수639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 글은 11월 초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의 글을 읽어보다 조금 수정한다는 것을 미숙하여 삭제를 시켰습니다.

고민 끝에 묵상 글을 없애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다시 올리는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제물, 번제물, 희생제물, 속죄제물, 순교, 봉헌 그리고 제사.


1. 예물, 제물, 제사 등이 하느님에게 있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2. 제사는 왜 생겨났으며,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3. 구약의 제사개념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완성되었나요?


우선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는 윤지충 바오로입니다.

윤지충 순교자는 어머니의 유교식 제사(祭祀)를 거부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매일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제사(祭事)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령이나 죽은 사람(조상)의 넋에게 드리는 제사(祭祀)와

후자의 미사를 통하여 드리는 제사(祭事)는 전혀 다릅니다.


구약성서에 제사(祭事)를 드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제사입니다.


찬양하는 제사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묵상하면,

하느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매일 만드신 피조물을 보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보면,

과일나무는 과일을 만들어

필요한 다른 피조물에게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이렇듯 모든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에게 자신을 내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고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만드신 순리이죠.

자신을 통하여 다른 피조물이 도움을 받고

이로 인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순환관계,

사랑을 배품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가 드러나고,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행위.

즉,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피조물에게 천지창조를 통하여 전달되었고

모든 피조물은 그 사랑을 서로 나눔으로써

세상은 사랑의 물결로써 감돌고

결과적으로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순리,

하느님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고

더 더욱 은총을 내려주시는 사랑의 순환,

이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입김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 세상을 다스리라 하셨죠.

물론 원죄로 인하여 벌을 받고 있습니다만

그런 속에서도 인간은 원죄의 고통을 이겨내고,

내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창조주께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바치니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반기셨습니다.


제물로서는

동물과 식물, 과일 등을 바쳤습니다.

최고의 제물은 자기 자신의 생명입니다.

결론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즉 제사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모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기에

인간이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반기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제사의 형식을 취하여 드리는 피조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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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구약성서를 살펴보면,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

카인은 땅의 수확물을 예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만 반기셨지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제물자체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닙니다.

즉 형식은 하느님께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수확물을 얻게 하여 주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가 필요한 것이죠.

카인은 그러하지 못하였나봅니다.

결국 카인은 시기심으로 아벨을 죽입니다.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죠.

우리의 모습도 카인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깊이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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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노아의 번제물(불에 태워 올리는 제물)이 구약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타락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공연히 인간을 만들었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피어오르는 타락한 인간의 악취가

하느님을 분노하게 하였고,

천지창조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하였죠.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땅을 밟아 바로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저를 이렇게 창조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대한

감사의 번제물을 바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

마음이 풀리셔서 축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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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브라함의 번제물로 인하여 그 개념이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왜 이러한 요구를 하셨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가장 의롭다는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홍수이후 노아 때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쳤는데

그러한 번제물의 의미가

정말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진정 느끼며

찬양하고 감사하는지 아니면

카인과 같이 형식적으로 바쳤는지 확인하고자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요구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행한 모든 제사가 위선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가 존재할 의미가 있을까?

(아마 하느님은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전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았고,

전지전능하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생명을 바치라고 하셨다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과 종을 데리고

사흘 동안 모리야 산으로 걸어갑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부모님도 아들의 고통을 본인한테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산 아래에서 종을 남겨두고

이사악에게 장작을 지게하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려 할 때

이사악은 물어봅니다. “아버지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라고 말하고 산으로 향합니다.

산에 올라 부자는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고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죽이려 할 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리는 극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숫양을 마련해주시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하느님은 천사를 통하여 축복을 하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고통을 감싸주시고

도리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성자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사랑의 본질이시며

원천이심을 나타내 보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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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사악의 마음을 생각하여 봅시다.

인간은 원죄 이후 죄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죄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계속적으로 예언자를 보내어 올바른 길을 제시함으로써

타락과 구원의 반복적인 역사를 보여 주십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제물이 되려한

이사악은 순명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전부였으므로

귀하게 또는 과보호로 자랐을 것입니다.

과보호 속에서 자란아이들은

부모님께 청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는 것이 보편적이라

대개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기 쉬우나

부모님 말씀에 한 번도 거부함이 없이

순명을 한 착하고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가장 완벽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선택합니다.

이사악은 그런 점에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선택된 어린 양입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외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과

제사의 의미를 배우고

항상 아버지 옆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사악이 제사를 드리려 가는데

어린양도 없이 장작만 준비하여 집을 떠난다고 하면

이미 자신이 번제물이란 사실을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악은 사흘 동안을 모리야 산으로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제사의 개념을 알고 있는 이사악,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

아니면 “하느님 저의 영혼을 바칩니다.”라고

생각하며 가지는 않았을까요?

사흘 동안 걸어 모리야산 아래에 도착한 이사악,

종을 두고 장작을 지고 가자는 아버지,

한번 더 확인하는 이사악 “아버지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의 답변을 듣고 암시적으로 번제물이 자신임을 알게 되는 이사악,

번제물은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이 준비하는 감사의 예물인데

어찌 하느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실지?

최고의 재물이 인간의 생명임을 배워온 이사악이 모를 수 있으랴.

그러나 그는 말없이 장작을 지고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제대를 쌓고 장작을 올려 준비를 마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묶도록 허락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사악은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여 봅니다.

“하느님 살려 주십시오”

또는 “하느님 이제 저의 영혼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영원한 천상의 행복인 하느님 품에 안기려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어린 양을 통하여

이사악의 순명정신은 번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사악의 행동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순명의 극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사악은 처음부터 저항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모리야 산에 가지도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장작을 지고 모리야 산에 올라가지도 않았고,

제대와 장작을 쌓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결정짓는 순간인 자신을 묶으려 할 때

뿌리치며 도망쳤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겁쟁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아버지가 무서운 사람일 지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백 살이 훨씬 넘은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사악이 제물의 개념이 없었다면

이 사건이 지난 후 부자의 관계는 아주 나빴을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무자비한 아버지에 대하여

어떤 신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사악은 하느님을 알았고 순명했으며,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순명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이사악을 통하여 우리는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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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모세에 의하여 제사 및 제물을 목적에 따라 세분하여

흠숭제(欽崇祭), 감사제(感謝祭), 기원제(祈願祭), 속죄제(贖罪祭)

등으로 규정짓고 율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변질되어 제물에만 눈 먼 타락한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희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피우는 향기를 역겨워하며

코도 돌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야훼께서는 악한 사람의 제물을 역겨워하시고

바른 사람의 기도는 반가워하신다(잠언15.8).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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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신약에서의 제사의 개념을 보고자 합니다.

구약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의 절정이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었다면,

신약에서의 제물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의 뜻에 따라 참 진리를 가르쳐주시고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희생제물,

어린 양이 되신 성자하느님이십니다.

 

성부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제물이 된 이사악은 원하지 않으시고 

이 모든 고통을 성부하느님의 외아들인

성자하느님께 십자가를 지움으로써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약의 제물은 모두 사라지고

성자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죄의 삶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물의 원 의미인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찬양의 예물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과 불쌍한 사람에게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봉헌예물인 것입니다.

이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속에 숨어계신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입김.

우리는 이러한 사람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발견하여야합니다.

그리고 도와야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제사이며 신약의 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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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 지성소였다면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집은 성당이며

미사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 그리고 감사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집인 교회는

하느님과 친교하는 곳이고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당을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꾸며야합니다.

그리하여,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위안을 얻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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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제 제물의 개념의 끝은

바로 성부하느님이 성자하느님을 제물로서 보내심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제물이 되라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모든 세상에 나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하며

하느님의 평화의 도구로서

또한 제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바칩니다.

12사도 중에 11사도가 복음전파를 위하여

비참히 순교함으로서 희생제물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봉헌이고 최고의 찬미이며 최고의 감사 예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빠스카의 신비이며, 성체성사의 신비이고, 나눔의 신비입니다

이러한 제물되신 분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고 주님을 믿고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참된 자녀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드린다면

하느님은 천지 창조 때와 같이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이것이 창조사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초대 한국 천주교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봉헌한 것을 생각하며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의

나눔의 삶을 통하여 사랑을 꽃 피워야하며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영광의 기회로 삼고

기꺼이 목숨을 봉헌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늘 깨어 있어라” 함이라 생각됩니다.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모든 사람이 어울려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것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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