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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장(智將) 알렉산더 대왕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9 조회수652 추천수9 반대(0) 신고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1 - 알렉산더 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大王(Alexndros the Great, BC 356-323)은 페르시아와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정복(征服)한 다음 이란 고원을 거쳐 그 당시(當時)만

 

해도 다른 세상(世上)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印度)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군사(軍士) 중에 열병(熱病)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繼續)되었으므로

 

BC 324년에 군대(軍隊)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遠征)을 준비(準備)하던 중 이듬 해(BC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大王은 학문(學文)에도 관심(觀心)이 많아서 당시의 대학자

 

(大學者)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마케도니아의 수도(首都)인 펠라의 궁정(宮庭)에 초빙

 

(招聘)하여 3년동안 그에게서 윤리학(倫理學), 철학(哲學), 문학(文學), 정치학(政治

 

學), 자연과학(自然科學), 의학(醫學) 등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메네쿰스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하학(幾何學)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정치(政治)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 잠시 짬을 내어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지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이해(理解)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大王은  "내가 이래뵈도 大王인데 이

 

권위(權威)로 좀 더 쉽게 그리고 빨리 배우는 방법(方法)은 없을까?"라고 스승인

 

메네쿰스에게 물었습니다. 메네쿰스는 지체(遲滯)없이 이렇게 대답(對答)했습니다.

 

"대왕님 ! 대왕님의 나라에는 대왕님의 전용도로(專用道路)나 사유도로(私有道路)가

 

있어 누구보다도 빨리 목적지(目的地)에 도착(到着)할 수 있으나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 일화(逸話)에서 "학문(學文)

 

에는 왕도(王道, 지름 길)가 없다."라는 격언(格言)이 생겼다 합니다. 학문을 사랑한

 

알렉산더 大王은 평소(平素)에 호메로스의 시(詩)를 애독(愛讀)하며 원정 때도 많은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學者)와 기술자(技術者)들을 대동(帶同)하여 각지

 

탐험(探險)과 측량(測量) 등을 시켰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복(征服)한 땅에는 알렉산

 

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都市)를 70여개나 건설(建設)하여 이 도시들이 헬레니즘

 

문화(文化)의 거점(據點)이 되는 동시(同時)에 동서문화(東西文化)의 교류(交流)와

 

융합(融合)에 지대(至大)한 공헌(貢獻)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偉大)한 정복자

 

(征服者)로 세계사(世界史)에서 영웅(英雄)의 한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大王은 백성(百姓)들에게 경애(敬愛)와 신망(信望)의 대상(對象)이자 용(勇)을

 

겸비한 지장(智將)이었습니다.

 

 

    

      (텔레비젼 다큐멘타리 필름과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 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2로 계속 이어집니다.

 

 

 

 

 

 
 
 
영화 스키피오
 
스키피오 금화
 
마케도니아..
 
영화 알렉산더
 
페르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인더스
 
페르세폴리스
 
바빌론의 문
 
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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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펠라의 궁전
호메로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석유 전쟁이 다시시작된다..풀빵닷컴
 
 장정원

알렉산더 편 - 보충자료 (펌)
배봉균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원인은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배우철/인터넷 과학통신원, 일양약품 연구소 연구원
woocbae@yahoo.co.kr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를 지배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까지 침략한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 그를 최후로 이끈 것이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주장이 발표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내부의 적대세력을 진압한 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까지 점령했다. 그의 치세 하에서 마케도니아는 서쪽으로 그리스, 동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도나우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렇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시(현재의 바그다드 부근)에서 돌연히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도 각각 주장을 달리했다. 지금까지는 그의 사망 직전 2주간의 기록을 근거로 사망원인이 독살, 독감, 티푸스라는 설이 있었다.

최근에 미국 버지니아주 위생국의 존 말(John Marr)과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찰스 캘리셔(Charles Calisher)는 급성 감염질환지(Emerging Infectious Disease) 12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웨스트나일 바이러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원인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나섰다.

말과 캘리셔는 그리스의 전기작가인 플루타르크의 기록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 성벽에 도착했을 때 수 많은 까마귀들이 허공을 날면서 서로 쪼아댔으며, 많은 수의 까마귀가 대왕의 앞에 떨어져 죽었다”고 언급된 것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 까마귀들이 웨스트나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까마귀는 웨스트나일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가장 쉬운 조류로서, 최근 미국에서 웨스트나일 바이러스가 만연한 것도 까마귀 과(family)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GIDEN(세계 감염증 및 면역학 네트워크)이라는 온라인 진단 프로그램을 사용해 자신들의 생각을 검정해 보았다. 당시의 알렉산더 대왕의 증상이었던 호흡기 감염증, 간장질환, 발진, 그리고 조류와의 연관성을 입력하자 웨스트나일 바이러스의 가능성이 100%로 확인되었다.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서아시아와 중동 등으로 퍼졌고, 1999년에 우연히 미국으로 유입된 이후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조류와 포유동물에 감염되는데, 사람은 모기를 매개로 해서 감염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이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해에만 284명, 올해는 10월까지 119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로드아일랜드대학에서 면역학을 연구하고 있는 토마스 메더(Thomas Mather)는 “이번 연구결과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로 사망하는 사람은 대체로 고령자거나 면역력이 약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전세계를 정복해 나갈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는데,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로 쉽게 사망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알렉산더 대왕과 버리는 용기

(예병일의 경제노트, 2004.11.10)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 휘하의 페르시아를 여러 차례 격파한 후 인디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대장정에서 무패의 신화를 이룬 배경에는 적절히 버리는 결단이 있었다.
대왕은 몸이 무거우면 진군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사들은 항시 다가올 전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모든 것을 완벽히 챙겨가기를 원한다. 특히 고대의 전투에서 식량의 확보는 강박관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병사들의 강박관념을 과감히 거부하고 빠른 진군을 택했다.

공격의 요체는 집중에 있고, 싸우는 것은 병사이지 식량이 아니다. 식량은 결국 전투에서 이길 무렵 따라온다.




알렉산더가 인로도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병사에게, 가서 위대한 힌두 신비가, 위대한 산야신, 성자, 현자를 찾아오라고 일렀다.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예, 강둑에 벌거벗은 사람이 서 있지요. 여러 해 동안 그는 거기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신비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결코 많이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

기 때문이지요. 그가 말하는 것은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립니다. 아마 그것은 진실일지도 모르고, 진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렉산더는 말했다.

"이 사람이 적당하다. 나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를 만들었다. 그는 이 비논리적인 사람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가서 그에게 알렉산더가 초대한다고 말해라."

 

병사들이 갔다.

그리고 이 벌거벗은 사람에게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초대한다고.

귀빈이 될 것이며, 모든 안락함과 편의가 주어질 것이며, 그러니 걱정 말라고.

 

그 사람은 웃기 시작했고,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 자신을 대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바보이다. 가서 그에게 말하라. 나는 바보들과 친교를 맺지 않는다고. 내가 바보들과 사귀기를 원한다면, 인도에는 그의 나라보다 그러한 바보들이 더 적다고 생각하는가? 마을은 바보들고 가득차 있다."

 

그들, 그 병사들은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그러나 돌아가 보고해야만 했다.

알렉산더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가를 물었다.

단다미(Dandami)가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기록에서 단다마스(Dandamas)라는 이름을 쓰곤 했다.

보고를 듣고는 알렉산더는 화가 났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마을이었고 변경이었다.

그들은 곧 인도를 떠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가서 이 사람이 어떤 형의 사람인가를 보는 것이 제일 좋겠다.'

 

그는 디오게네스(Diogenes)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사람은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강가에 벌거벗은 채로 서 있었다.

그와 똑같은 일이 디오게네스에게서도 일어났었다.

그 역시 웃었고 알렉산더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칼을 빼어 들고 단다미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를 따라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머리를 즉시 베어버릴 것이다. 나는 토의를 믿지 않는다. 나는 명령을 믿는다."

 

그 사람은 웃었고, 말했다.

"베어라, 지체없이! 그대가 베어버릴 머리를 나는 오래 전에 잘라버렸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머리가 없다. 베어라.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 그대는 그것이 떨어지는 것을 볼 것이고, 나 역시 그것이 떨어지

는 것을 볼 것이다. 나는 머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 (Diogenes)


기원전 412?~기원전 323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람의 욕심을 금지하는 퀴닉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원시적이며 문명을 반대하는 생활을 스스로 실천한 철학자로 이름이 높다. 죽을 때까지 한 벌의 옷과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통 속에서 지냈다. 그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묻자, ꡒ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그 곳을 비켜 달라.ꡓ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굉장히 어려운 문제나 일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알렉산더 대왕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알렉산더는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폴리스(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고 그 대신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가 흥기했다. 기원전 359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필립(Philip)은 정치, 군사적 개혁을 통해 강력한 통일 왕국을 만들고 막강한 상비군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개별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를 통합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테베와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기원전 338년에 케로네아에서 크게 패했다. 승리한 필립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암살되고(기원전336)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소아시아를 정복했다. 여기서 페르시아 군을 몰아낸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고르디우스에 들어섰다.

 

이 도시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의 기둥에 한 대의 짐수레가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매듭은 너무 절묘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는 신전으로 가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단칼에 그 매듭을 베어 버렸다. 이제 그는 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지위를 약속받게 되

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듭을 푼 것은 아니라 난폭하게 잘라 버린 것이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 버린 것은 알렉산더와 그의 제국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알렉산더는 먼저 후방을 평정하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일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했다(기원전 331). 이 도시는 이후 300년 동안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성했다.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평정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해 또다시 동방으로 향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티그리스 동쪽의 가우가멜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중앙아시아로 도망쳤다가 거기에서 살해되었다. 페르시아는 멸망한 것이다.

 

이제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그리스 세계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는 인도로 향했다. 당시 그리스 인들은 인더스 강 너머에 동쪽 세계의 끝이 있고 그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

계의 끝에 도달하여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알렉산더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인더스 강을 넘어서도 아시아 대륙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군대가 처음 경험하는 인도의 자연 환경

은 너무나 지독했다. 무더위와 장마가 그들을 괴롭혔고 식량 부족도 한 몫 거들었다. 거기에다 주민들의 저항마저 만만치 않았다.

 

지친 군대는 알렉산더에게 원정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틀이나 고민하던 알렉산더는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고생고생하여 그들이 옛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324년이었다. 마케도니아를 출발한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다음해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더는 예기치 않게 말라리아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계를 정복한 그도 자연의 질병에는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후계자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권력 다툼 끝에 세 왕실이 유력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오리엔트와 소아시아의 일부를 지배하는 시리아의 셀레쿠스(Selecus)왕실,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왕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Antigonus)왕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나라도 끊임없이 대립했다.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기에 알렉산더는 대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정복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복은 말 그대로 군사적 정복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랐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잘라 버린 매듭처럼 그의 제국도 그가 죽은 후 조각조각 잘려 나갔던 것이다.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this8423/120007118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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