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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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26 조회수868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All men will hate you because of me,

but he who stands firm to the end will be saved.

(Mt. 10.22)

 

제1독서사도행전 6,8-10; 7,54-59

복음 마태오 10,17-22

 

어느 대기업 인사 담당자가 입사 지원자들을 모두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좋으니 스님들에게 이 나무빗을 파십시오. 주어진 기간은 열흘입니다. 가장 많이 판 분을 우리 회사의 영업 부장으로 뽑도록 하겠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스님에게 빗을 팔라는 황당한 제안이라 결국 끝까지 남은 사람은 딱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열흘 뒤, 흩어졌던 세 사람이 회사로 돌아왔고 인사 담당자가 얼마나 팔았는지를 묻습니다. 첫 번째 지원자가 말해요.

“열흘 동안 산속 절에 드나들면서 있는 대로 고생하다가, 내려오는 길에 바위에 앉아 두피를 긁고 있는 스님 한 분을 만나 재빨리 빗을 내밀었지요. 그러자 스님이 빗으로 두피를 긁어보더니 시원하다기에 한 자루를 팔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지원자도 말합니다.

“저는 유명한 산의 고찰을 찾아갔습니다. 산이 높고 바람이 세서 절을 찾는 참배객들의 머리카락이 다 엉켜 버리더군요. 그래서 저는 주지 스님에게 ‘이 나무빗을 문밖에 비치하면 참배객들이 머리를 단정히 하고 들어오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지요. 그 산에는 절이 모두 열 곳이었으므로 같은 방법으로 열 자루를 팔게 됐지요.”

마지막 세 번째 지원자에게도 몇 자루를 팔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천 자루를 팔았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인사 담당자는 깜짝 놀라서 그 방법을 물었지요.

“저는 유명한 절을 찾아가서 주지 스님에게 이런 제안을 했지요. ‘신자들이 더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찾게 하기 위해서 기념할 만한 답례품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져온 이 나무빗에 적선소(積善梳, 선을 쌓는 빗)라는 세 글자를 새겨 스님이 직접 신자들에게 답례품으로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자 스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그 자리에서 나무빗 천 자루를 사셨습니다. 또한 저에게 앞으로 여러 종류의 빗을 더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셨지요.”

스님에게 빗을 판다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같지요? 하지만 이 글을 보신 분들은 “아~~ 스님에게도 빗을 팔수도 있겠구나.”라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어떠한 상황도 불가능한 상황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을 내리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지요?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능력에만 비추어서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초대 교회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으로서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했다고 하지요. 이 모습을 보고는 사람들은 시기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보다 잘 난 이 스테파노를 받아들이지 않지요. 그래서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은 뒤, 그들은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합니다.

스테파노는 어떤 죽음의 공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끝까지 자신 있게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포기하지 않고 순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을 포기하지 않고 박해를 견디어 냈기에 참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박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박해는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선행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뭐…….’라면서 포기하게끔 만드는 박해.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이 일이 더 중요한데…….’라면서 뒤로 미루게끔 만드는 박해. 주님께 약속이나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구차한 이유를 들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박해.

나는 현재의 박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을까요? 스테파노 성인과 같이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현재의 박해를 이겨내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현대의 박해를 극복하여 봅시다.



 
길 잃어보기('매일매일자라기' 중에서)



"건축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시를 아는 것이다. 도시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잃어보는 것이다." 내가 시시때때로 하는 말이다.
길을 잃는다는 행위는 '잃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찾는 행위'가 중요해짐을 말한다.

어떻게 찾을것인가?
무엇을 찾을 것인가?
단서는 어디에 있는가?
위험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그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이가?
즐거움은 어떤 것인가?
만약 다시 여기 온다면 확실히 길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이 곳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곳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이런 즐거움이 바로 길을 잃어보는 즐거움이다. 길을 잃고 또 길을 찾는 과정에서 공간, 장소, 생활, 사람,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한 노하우가 생긴다. 실수를 통해 얻어지는 진짜 지식, 모색의 모색을 통해서 얻어지는 진짜 체험이 길 잃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when they arrest you, do not worry about what to say or how to say it.

At that time you will be given what to say,

(Mt.10.19)

 

Love's First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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