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강론] 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ㅣ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28 조회수81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12월 28일 목요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무죄한 성인들’이라고 부르는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주님의 성탄 무렵에 지내고 있다. 마태오 복음 2장 16-18절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한 뒤, 갓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축일의 기원은 2-3세기 교부들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죽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찬양하면서 이들을 그리스도교의 가장 첫 순교자들로 여기곤 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5세기에 순교 축일로 제정되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
마태오 2,13-18)

 

 A voice was heard in Ramah,
sobbing and loud lamentation;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she would not be consoled,
since they were no more.

 


 ☆☆☆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났다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한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권위는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


헤로데 임금이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죽이도록 지시한 내용은, 그 옛날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강물에 던지게 하였던 탈출기 1장 22절의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었던 것처럼 아기 예수님 또한 베들레헴의 학살에서 살아남으셨다는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서 바로 새로운 모세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구세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제2의 모세로서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십니다.
죄 없는 어린이들이 순교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 모두를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


전에는 8부 축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정된 현행 전례 개혁안에는 성탄과 부활만을 8부 축제로 보내고 있습니다.

‘8부 축제’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 탄생과 부활의 기쁨은 하루만 기뻐하고 경축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하기에 적어도 8일 동안 함께 기뻐하라는 의미로 제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8부 축제의 의미에 따라 주님 탄생을 기뻐하기에도 부족한 이 시기에, 우리는 어쩌면 주님 탄생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다른 순교 축일을 함께 기념합니다.

지난 월요일 성 스테파노 순교 축일과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의 순교 축일이 그렇습니다.


왜 기뻐해야 하는 이 순간에, 기쁨과는 거리가 먼 순교, 죽음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기쁨과 슬픔은 늘 함께 오는 것이기에, 슬픔을 거부해 버리면 참된 기쁨 역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마도,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하는 모습과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과 너무 비슷하기에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라고 기도를 드리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스테파노 성인 역시,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드리며 순교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혹 있다고 해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헤로데의 욕망,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지닌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그런 억울하고,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생겨서는 안 되는 그런 부당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병든 사람을 고쳐준 죄입니까?

가난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린 죄입니까?

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입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그 당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이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가 똑같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주님의 복음이 세상 많은 곳에 전해진 오늘날에도...주님을 구세주요, 사랑의 아버지로 믿고 있는 오늘날에도,  매일 2-3초 사이에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가 없는 이 시대에 왜 무죄한 어린이들은 계속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낙태’ 라는 이름의 또 다른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어른들의 쾌락만을 탐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거의 방종에 가까울 정도의 무책임한 행동이 결과 때문입니다.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낳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매일 그렇게 무죄한 어린이들은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무죄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그렇게 십자가상에서 부당하게 돌아가시는 고통, 아픔을 겪고 계십니다.


왜, 계속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이런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분명 이해되지 않고 잘 풀리지 않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신비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무능력 때문입니다.

거창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오시어 세상의 모든 악과 죄를 당신 십자가에 모두 짊어지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업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이루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늘 죽고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에서.. 늘 무죄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죽어가는 그 모습에서 미약하면서도 동시에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절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힘없고’ ‘어쩔 수 없는’ 그 모습,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전능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만이라도, 무죄한 아이들이 무참히 순교하는 그런 범죄에, 무죄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잘못에 동참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이찬홍 야고보 신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