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아남네시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31 조회수770 추천수5 반대(0) 신고
 

<아남네시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2)


  유대신앙에 열심인 신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지만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파스카절에 한번 순례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되어야 성년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부모에게 모든 권리와 책임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례의 의무가 없었던 소년 예수가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을 순례한 것은 부모가 율법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모르고서 뒤늦게 찾아 헤매는 것은 그 당시엔 강도떼가 자주 출몰했기에 여행객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리 중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 부모는 아마도 자식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바로 상실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요? 숫제 죽음보다 실종이 주는 상처가 더 크다고 합니다. 모든 원인이 자신의 불찰에서 비롯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모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혹시 늑대나 맹수에게 당하지나 않았을지 강도에게 붙잡혀 죽도록 매 맞지나 않았을지 등등 온갖 망상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 사흘 동안 부모는 온갖 절망 속에서 헤매었을 겁니다. 그 안타까운 심정이 성전에서 찾았을 때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직까지 예수의 부모는 육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에게서 죽고 하느님의 영으로 태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이때 어린 예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왜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했느냐는 표현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집에 있을 텐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흘이나 다른 곳에서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먼저 성전으로 찾으러 왔어야 했다는 지적입니다.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한 것이라는 책망입니다.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아가며 그 보살핌 안에 신뢰를 두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겪는 상실의 체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자신의 죽음을 체험합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여태껏 신조로 알고 유대교 율법을 지키며 그리스도 추종세력을 잡아드리는 자신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끊어버리고 상실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며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울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바오로로 사는 것입니다.

  어린 예수를 성전에서 찾고 난 뒤에 부모는 예수의 말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중심에 두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길러주는 부모이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모는 이 성전에서 아이를 찾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표현은 想起(remembrance)한다는 뜻입니다. 죽은 기억이 아니라 계속해서 체험하는 가운데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매 미사 때 성찬의 전례에서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아남네시스) 것과 같습니다.

  성가정은 단순히 육신의 가족애로 구성된 가정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며 언제나 그 뜻을 상기하고 기념하는 가정이라야 성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Only Time - E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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