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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2)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2 조회수669 추천수6 반대(0) 신고

 

 

                                          글쓴이 : 전 원 신부님 : 말씀지기 주간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내 삶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캄캄하게 느껴지던 시절,

혼자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을 끝내면 내 삶에 어떤 분명한 해답을 얻을 것만 같았습니다.

 

 

낡은 배낭에 쌀 한 봉지, 김치 한 통을 넣고 1월1일 새해 첫날 이른 새벽 집을 나왔습

니다. 당시 이충우씨가 쓴 순교 성인들의 신앙 답사기인 (한국의 성지)를 손에 쥐고

서 한 달간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첫날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천진암을 출발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도, 전라도를 거쳐 경상도 내륙지방과 충청북도를 돌아오는 순례의 여정이었습니다.

여행경비가 넉넉지 않은 학생시절이라, 차 시간이 맞으면 완행버스를 타고, 그렇지 않으면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몸이 지치면 지나가는 트럭이나 경운기를 빌어타고,

밤이 늦으면 착한 마음씨를 가진 농부의 집 한켠에서 잠을 잤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묵주기도를 바치고, 순교성지의 묘역 앞에서는 간절하게 내 삶의 미래에 대하여 분명하게 뭔가를 알려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딱히 무엇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싶다고 간절히 아뢰었습니다.

마치 진리를 찾아 만행(萬行)을 하는 수도승처럼 겨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1월 한 달을 그렇게 산과 들을 헤매면서 보냈습니다.

 

 

여행은 끝났지만 제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순교 성지를 빼놓지 않고 순례하니까 작은 기적이라도 체험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겨울 한 달간의 긴 여행은 피곤에 지친 몸과 실망스런 마음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몸살을 앓고 난 후, 그 여행은 어느덧 제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언제부턴가 늦은 밤이라도 시간이 나면 터덜터덜 남산길을 혼자 걷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남산 산책길은 도심 한복판에 사는 저에게 더없는 위로의 장소입니다. 사람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있듯이, 저역시 나름대로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커피향을 즐기고 독서를 할지 모르지만,

저는 남산 산책길을 걸으며 내면에 담겨 있는 나의 이야기와 대화를 나눕니다.

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미래의 이야기까지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덧 목적하던 산책로를 다 걷게 됩니다.

 

 

벌써 20년이 훨씬 지난, 한겨울의 순교성지를 찾아 다녔던 긴 여행의 추억도 남산 산책길을 걸으면서 기억해 낸 내면의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무의미하게만 생각되던 잊혀진 젊은 시절의 겨울 여행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저에게 소중한 응답을 해 주었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듯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던

나의 미래를 하느님은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 들어와 꾸며 주셨습니다.

 

 

길을 잃으면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길을 안내받고,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을 때면 누군가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 주었던 이런 나의 여행 체험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렸던 삶의 체험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내가 어둠 속을 헤맬 때 누군가가 다가와 벗이 되어 주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때 누군가 나의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하여 사제로 서품받도록 인도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이렇게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는것도 하느님이 제 인생에 숱하게 많은 분들을 선물로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방황을 하듯 전국을 헤매며 찾았던 내 삶의 그 무엇을,

침묵의 하느님은 묵묵히 제 삶 속에서 하나하나 응답해 주고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고은의 장편 소설 (화엄경)의 이야기가 기억에 새롭습니다.

진리의 세계를 찾아 주인공 어린 선재가 길을 떠납니다.

나그네 길에서 만나 숱한 사람들이 모두 진리의 스승이었습니다.

바라문도 장사꾼도 창녀도 어떤 소녀도 하늘과 땅속의 신들도.......

모든 것이 진리의  단편(斷片)들이었습니다.

 

 

우리 삶 속에 만난 모든 것은 이렇게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만남,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도 언젠가 소중한 나의 스승이 되어 내 삶의 한부분을 꾸며 놓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 죄스런 기억들도 하느님은 그것을 그냥 버리지 않으시고 은총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거나 의미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맨 어린 동자 선재, 그 자신이  화엄(華嚴)의 세계였듯이, 우리 인생과 만난 시간의 조각들은 하느님 안에서 아름다운 꽃이 되고 열매가 됩니다.

 

 

우리를 내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들의 인생의 이야기는 곧 하느님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삶의 이야기를 하느님에게서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

 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코린 13,12)

 

 

다시 한번 새해를 맞으면서 긴 겨울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낡은 배낭을 찾아내어 쌀 한 봉지와 김치 한 통을 집어넣고 그 옛날 그 길을 따라 다시 걷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묻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렇게 여행을 하듯 어디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가난한 순례자의 삶을 사는

그런 사제가 되길 청하겠습니다.

 

 

      ㅡ말씀지기 신년호에 실린 편집자 레터 전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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