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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영상과 글] 까르첼리 은둔소를 찾아서...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2 조회수843 추천수7 반대(0) 신고



                       까르첼리 은둔소


까르첼리 은둔소(Eremo delle Carceri)는 해발 791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1205년과 1206년 사이에 이 산에 프란치스칸의 삶이 자리잡게 되는데, 젊은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통하여 그의 삶의 길을 찾기 위하여 자주 찾던 바로 그 곳이다. 그 때에는 이웃 성 베네딕토 수도원 부속의 작은 은둔소 하나와 그 주변에 흩어진 몇 개의 동굴들만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초기 형제들이 침묵과 기도를 하기 위하여 자주 이 곳을 찾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1210년(또는 1211년)에 사순절을 여기서 보냈다. 1211년 실베스테르 형제가 이 곳을 찾았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관상과 활동생활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클라라와 그에게 자문을 청했기 때문이다(대전 12,2; 잔꽃 16).

126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이 은둔소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수도원(Sacro Convento) 소속이었다. 그 때에는 이미 몇 개의 방들 또는 적어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몇 개의 동굴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 초에 이 곳은 요한 22세의 분노로부터 아시시 시의 보호를 받은 프라티첼리라는 이단 그룹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1340년에 오디의 제라르도 총봉사자에 의해 추방되었다. 1370년에서 1373년 사이에는 바뇨쏘 트린치의 바올루쵸 형제에 의해 추진된 개혁 센터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때부터 15세기 내내 카르체리는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여기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 즉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마르케의 성 야고보, 복자들 안토니오 포르넬리오, 스트론코네의 요한, 스트론코네의 안토니오(그는 여기서 30년을 살다 1461년 성 다미아노에서 죽었다), 펠트레의 베르나르디노, 바르나바 마나쎄 등이 머물게 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회규준수’(Osservanza)와 초기의 정신에로 되돌아가려는 옵세르반티 운동이 일어났다.

카르체리 은둔소는 프란치스칸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은둔소들(코르토나의 첼레, 몬테카살레, 포지오 부스토네, 그레치오, 폰테콜롬보, 나르니의 스페코, 스폴레토의 몬테루코, 체토나 등) 중의 하나이다.
옛 수도원을 나와 왼쪽으로 향하면 작은 15세기의 성당(2)이 나온다. 이 성당은 ‘성 베르나르디노 경당’이라고도 하는데, 그 벽에는 14세기 첫 중반에 그린 지오토 유파의 ‘십자가 형’이 있다. 이어지는 옛 경당(3) 또는 초기 은둔소라고 부르는 곳은 성 프란치스코 시대에 이미 있었던 곳으로서 주변 동굴들에 거처하던 초기 형제들이 공동기도를 바치던 곳이다. 제대 위에는 십자가형을 표현한 13세기의 프레스코화 위에다 1506년에 그린 아기 예수와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화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동굴은 성 프란치스코의 돌 침대와 경당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동굴의 출구에는 동굴을 막는 ‘악마의 구멍(Buco del diavolo)’이라 부르는 붉은 돌이 있다.
숲 위쪽 가까운 곳에 맛세오, 루피노, 그리고 작은 다리를 건너 숲 아래쪽에 레오, 베르나르도, 실베스테르 그리고 복자들 에지디오, 스펠로의 안드레아(†1254), 스트론코네의 안토니오 형제 등이 자주 찾았던 동굴들이 있다.
한편, 막달레나 경당 오른쪽의 다리 부근에는 1882년에 빈첸소 로시뇰리의 청동 작품 ‘산 비둘기를 한 소년에게서 놓아주는 프란치스코’(잔꽃 22 참조)가 있다.

-프란치스코의발자취를 따라서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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