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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 다윈 (펌)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4 조회수325 추천수4 반대(0) 신고
 
 
 
 
다윈 (Darwin, Charles Robert)
 
 
 
 
[1809.2.12~1882.4.9] - 펌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의 서부지방인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내과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1766-1848)이고, 어머니는 스잔나 다윈 웨지우드(1765- 1817)이다. 찰스는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찰스의 부계는 의사집안으 로 유명했으며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일찍이 진화론을 주창했다. 모계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도자기 제조로 유명한 집안이다.찰스는 4살 때 가족과 함께 갔던 곳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조개껍데기, 광물, 동전, 자갈 등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신기하고 낯선 생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찰스를 가업을 잇게 하려고 에든버러대학 의학부에 입학시켰다. 당시는 마취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여서 찰스는 아파서 부르짖는 환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수술실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자연과 박물학에 쏠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목사를 만들 생각으로 케임브리지대로 보냈다. 다윈은 목사 수업중에도 식물학 교수인 스티븐스 헨슬로우(1796-1861)와 친했고 동식물과 곤충을 모으는 장난을 계속했다. 1831년 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지질학자인 아담 세지위크(1785-1873)와 함께 북부 웨일즈지방의 지질을 조사했다. 또 박물학자를 따라갔다 온 흑인에게 돈을 주고 박제법을 배우기도 했다.

 

1831년 여름 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일이 생겼다. 해군성에서 2년 예정으로 남아메리카, 태평양, 동인도제도의 수로를 조사하고, 전세계 여러 곳의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영국전함 비글호에 탑승할 사람을 모집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이김으로써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게된 영국이 세계 각지를 조사하고 연구할 때였다. 영국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로 와 해안선을 조사하고, 섬들과 항구도시들의 지리적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비글호를 파견했다.

 

비글호의 선장은 찰스 다윈보다 4살 위인 피츠 로이(1805-1865)였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성경을 철저하게 신봉했다. 그는 성경에 쓰인 대로 지구가 창조됐다는 것을 실증할 눈에 보이는 증거를 수집할 박물학자가 필요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함장 생활에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함장은 권위의 상징이어서 항상 외로웠다. 실제로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비글호 를 지휘한 프링글 스토크스는 함장의 외로움과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또 당시의 관례는 외과의사인 군의관이 박물학자를 겸했으므로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이 함장이 찾는 사람은 공식 박물학자가 아닌 그의 말벗이었던 셈이다.

 

처음에 연락을 받은 헨슬로우 교수는 자신이 갈 수 없게 되자 다윈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다윈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 경험이 목사 수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항해를 포기하고 사냥이나 하려고 외삼촌집 으로 놀러갔다. 그런데 외삼촌이 후원자로 나서며 그를 도왔다. 외삼촌은 찰스의 아버지에게 다윈을 항해에 참여시켜야 될 이유를 조목조목 적은 권유편지를 썼다. 그것을 읽은 아버지 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를 허락해 주었다.

 

한편, 로이 함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글호를 개조했다. 네문의 대포를 없애 공간을 넓혔고 세번째 돛대를 세워 항해속도를 높혔다. 배 밑바닥에는 구리판과 모전(양탄자)를 대어 방수장치를 보강했으며 피뢰침도 설치했다. 함장은 사비로 준비한 경도측정용 시계를 22개나 실었고, 담당자도 한사람 승선시켰다. 길이 30m, 적재량 2백42t이었던 비글호는 육류 통조림과 건조된 과일을 실어 항해에 필요한 준비를 끝내자 5백t에 이르렀다. 마침내 비글 호는 1831년 12월 27일 영국을 떠났다. 이때 다윈의 나이는 22세였다.

 

찰스 다윈은 승선과 긴 항해가 처음인지라 멀미를 심하게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비글호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항에 기항했을 때 노예제도를 찬성한 함장과 심한 언쟁을 벌여 배에서 내릴 뻔하기도 했다. 항해는 함장의 사과로 계속됐다. 한편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인 외과의사가 리오데자네이로항에서 하선하자, 찰스 다윈이 그 자리를 맡았다.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리오데자네이로부터 비글해협까지 남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지 방을 탐사한 다음, 마젤란해협을 돌아서 칠레 남부와 중부를 거쳐 안데스산맥을 넘었다. 해안을 따라 페루까지 올라간 그는 태평양으로 나서 갈라파고스제도, 타히티섬, 뉴질랜드, 오 스트레일리아 등 당시 한참 개척되기 시작한 곳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인도양의 킬링군도와 모리서스섬, 남아프리카,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과 아센선섬 등을 찾아다니다 보니 비글호의 여정은 점점 길어졌다.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


     

    비글호 항해기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펼쳐진다. 1832년 2월 비글호는 브라질 산살바도르에 도착했다. 이곳에 며칠을 보내던 어느날 다윈은 바닷가에서 가시복어의 생태 를 관찰하게 됐다. "이 물고기는 거의 구형으로 몸을 팽창시키는 기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비교해부 학자 퀴비에(1769-1832)는 이 상태에서 어떻게 헤엄칠 수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관찰 해보니 이 물고기는 직선으로 전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해 회전을 했다. 이 물고기가 몸을 팽창시키면 껍질을 덮고 있는 돌기들이 일어서 뾰족하게 된다. 알랜 박사는 상어 뱃속에서 살아 있는 가시복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상어의 위와 옆구리를 뚫어서 상어가 죽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작고 연한 물고기가 크고 무서운 상어를 죽일 줄이야."

     

    가시복어가 상어를 죽인 이야기는 물론, 물새의 비린내를 없애는 방법, 거미와 벌의 목숨을 건 싸움, 개미의 먹이사냥, 소리를 내는 물고기와 나비 , 바닷물의 색깔이 변한 이야기, 콘도르독수리의 비행모양과 잡는 방법 등 다윈이 듣고 본 이야기들이 비글호 항해기에서 끝 없이 펼쳐진다.

     

    "1832년 4월 19일. 나는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많은 곤충을 채집했다. 특히 귤나무 숲속에 서 사는 파필리오 페로니아라는 나비의 습성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것은 달아날 때 다리를 사용하는데, 내가 본 유일한 나비였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이 나비는 교묘하게 달아났다. 특히 기묘한 것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이다. 톱니바퀴가 용수철의 고리를 지나갈 때 '딸깍'하고 내는 소리와 흡사했다. 나는 이 관찰에서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자신한다."

     

    비글호 항해기에는 당시의 사회상도 담겨 있다. 남아메리카의 끝에 살면서 총이 무서운지 몰라 멸종된 인디언들의 비참한 최후, 당시 노예들의 생활과 백인들의 잔악한 행동, 뉴질랜드 원주민의 혐오스러운 장례식 등에 관한 다윈의 목격담은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볼 수 없 다.

     

    비글호 항해기는 생태보고서로서도 가치가 높다. 반딧불이, 모기, 빈대와 같은 곤충류, 퓨 마, 아르마딜로, 카피바라, 스컹크 등의 포유동물, 신천옹새, 벌새, 날개에 발톱이 있는 새 등 의 조류, 군소, 헤엄치는 게 등의 물고기와 갑각류, 야광충과 같이 작은 바다에 사는 미생물, 거북, 도마뱀, 뱀, 개구리 등의 파충류와 양서류 등 다윈이 보았던 낯설고 신기한 수많은 동물들의 습성과 생태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수천km를 떠다니는 씨와 나무와 같은 식물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갈라파고스제도의 모든 섬에서 육지거북이 발견된다. 물이 없거나 건조 한 저지대에 살고 있는 이 거북은 주로 즙이 많은 선인장을 먹는다. 물을 대단히 좋아해서 엄청난 물을 마시고 진흙 속에서 뒹군다. 나는 개구리가 방광에 생존에 필요한 수분을 저장 한다고 믿고 있다. 육지거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샘에 왔다가면 얼마 동안 거북의 방광은 액체로 불룩하나 점점 줄어든다. 주민들은 저지대를 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거북의 방광에 든 내용물을 마신다. 그 액체는 투명했으며, 내가 직접 맛본 바로는 약간 쓴맛이 있었 다."

     

    그는 화석과 지질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지질을 조사하고 규화목, 네 발동물의 뼈와 이빨화석, 조개화석 등의 화석을 모았다. 또 화석동물들이 살았던 옛날을 생각해 그 화석동물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길을 통해 없어졌는지를 지금의 지식을 기준으로 판단해도 아주 합리적으로 유추했다. 그는 칠레에서 경험한 커다란 지진에 큰 충격을 받 았다.

     

    "1835년 2월 20일. 칠레 발디비아의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다. 바닷가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진동이 정동쪽에서 왔다고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남서쪽에서 오는 것처럼 생각했다. 이 것은 지진의 진동방향을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몸무게 때문에 휘어지는 얇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지진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관념을 일시에 파괴했다. 견고하다고 생각한 지구가 액체 위의 얇은 껍질처럼 우리의 발 밑에서 흔들렸다." 다윈은 남아메리카대륙이 융기하면서 생긴 지질학적 변화와 안데스산맥이 생긴 과정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갈라파고스제도에서 관찰했던 새와 거북들이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생물은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종이 발전한다는 위대한 진리인 진화론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누구나 진화론을 인정한다. 단지 진화하는 과정을 지금도 연구하고있을 뿐이다. 진화론은 생물과 지질학에 깊은 소양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다윈은 훌륭한 생물학자요, 지질학자요, 화석을 연구한 고생물학자요, 위대한 박물학자였다.

     

    다윈의 커다란 업적은 산호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1836년 4월 12일 킬링섬에서. 산호초에는 환초, 보초, 거초 등 세가지가 있다. 환초는 원반모양으로 형성된 산호초이고, 보초는 대륙 또는 큰 섬의 해안 앞으로 직선으로 발달하거 나 작은 섬을 둘러싼 산호초이다. 거초는 육지와 바다가 접하는 곳에 리본모양으로 펼쳐지 는 산호초를 말한다. 거초는 육지가 천천히 융기할 때 생기고, 반면 환초와 보초는 침강할 때 형성된다."

     

    다윈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면서 산호초의 종류와 차이를 명확하게 파악해 산호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밝혀냈다. 즉 산호초가 산호 자체의 생태와 해양지각의 침강과 융기등 의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이와 더불어 화산분포로부터 지구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후일 그의 설명에 반박하는 주장이 있었으나 해저를 굴착한 자료로 다윈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 해 주었다.

     

    비글호 항해기는 1839년에 초판, 1845년에 2판, 1860년에 3판이 나왔다. 다윈은 친구에게 주려고 비글호 항해기를 사면서 출판사에 빚을 지기도 했다. 만년에 그는 비글호 항해기에 대해 "나의 최초의 문학적 작품이 성공해서 어떤 다른 책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준다"라고 술회했다.

     

    2년 예정으로 떠난 비글호의 여정은 거의 5년이 걸렸다. 1836년(27세) 10월 2일 비글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다윈의 손에는 보고 느낀 것을 꼼꼼하게 적은 18권의 공책이 들려 있었다. 이것에 근거해 1839년에 펴낸 책이 바로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 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로 평가받는 비글호 항해기는 그가 쓴 많은 논문과 책 가운데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출판된지 1백60년 동안 한결같이 애독되고 있는 이유는 찰스 다윈이 오랫동안 비글호를 타고 다니면서 모은 항해의 기록이라는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물, 화석, 지질,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 등 방대한 분야를 다윈이 세심하게 관찰해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후 1838년(29세) 영국지질학회 서기가 됐다. 이듬해에는 영국학사원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 지위에 오르기에는 아직 젊었지만 학자들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1839년 1월 사촌누나인 엠마 웨지우드 (1808-1896)와 결혼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1841년 2월에 지질학회 서기직을 사임했다. 남아메리카에서 걸렸던 풍토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는 1835년 3월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를 답사하던 중 침노린재과의 벤추카빈대에 물려 풍토병인 사가스병에 걸린 바 있었다. 브라질 수면병으로 알려진 이 병에 걸리면 어린이는 죽을 수 있으며 성인은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금도 벤추카빈대는 문제가 돼 남미국가들은 대대적인 박멸운동을 벌이고 있다.

 

찰스 다윈은 1859년(50세) 불후의 명저인 '종의 기원'을 발간했다. 그러나 병 때문에 여행도 하지 못하고 일생을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73세로 다운에서 타계해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장됐다. 슬하에는 6남 4녀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7명의 자녀만 성장했다. 이 중 3명은 경의 칭호를 받았다. 한편 비글호는 1854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조사하는데 쓰였다.   

 

   
 

이강길

 
 

 

Welcome To My World - Anita Kerr Sin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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