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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순명 빼고 나면 ㅣ 양승국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6 조회수685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7년 1월 6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마르코 1,7-11)

 

 “One mightier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stoop

and loosen the thongs of his sandals.
I have baptized you with water;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요한은 자신을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했으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과 요한은 겸손함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드님으로 선포하신다


 ☆☆☆


   물이 바다에 이르고자 하면 아래로 흘러야 하고, 하늘에 이르고자 하면 수증기의 형태로 순수하고 가볍게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음이 큰 사람은 겸손하게 아래로 흐르는 삶을 살고, 정신이 높은 사람은 맑고 청렴한 삶을 살아갑니다. 요한 세례자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지대한 예언자로서 그 마음과 정신이 누구보다도 더 넓고 맑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려 떼를 지어 몰려왔고 너도나도 물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을 벗기는 일은 노예에게만 전적으로 맡겨진 미천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노예들이 하는 일조차도 자신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스스로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미천함을 드러냅니다. 실로 요한 세례자의 영향력으로 볼 때 이러한 비하의 말은 유다인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세례자의 진정한 겸손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주님은 더욱 커지시도록(요한 3,30 참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작은 영성’이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보다는 주님을 앞세우는 겸손한 신앙인이 될 때 진정한 복음 선포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순명 빼고 나면>


오늘 요르단 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가지시는 분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회개와 새 생활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셨습니다. 무죄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따라서 세歌?필요 없는 분이셨습니다.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오신 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하신 아들 예수님이셨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밖으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런 흡족해하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흐뭇하고 가장 마음이 흡족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아이들의 자신의 뜻(어둠의 길을 버리지 못하는 것, 악습을 떨치지 못하는 것, 우선 돈 좀 손에 쥐어 보는 일, 그래서 한번 멋지게 놀아보는 일 등등)을 드디어 거두고 우리들의 뜻(우선 괴로워도 멀리 내다보는 일, 어디든 꾸준히 붙어있는 일, ‘욱’하는 성격 버리고 인내하는 일 등등)을 따를 때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 드믄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순종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가장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보시고 엄청 기뻐하십니다. 흡족해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위기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이렇게 외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왜 이런 표현을 쓰셨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한 평생에서 아버지께 대한 순명 빼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순명하셨습니다.


오랜 나자렛에서의 생활 중에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완벽히 순종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든 부모를 떠나십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출가를 감행하십니다.


세례의 순간이 되자 어김없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피하고 싶은 잔이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죽음과도 같은 쓴잔을 드셨습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드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자 정녕 올라가기 싫은 곳이었지만 자진해서 죽음의 갈바리아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한 평생은 자기 의지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유혹 가운데 아마 가장 큰 유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뭔가 한번 해보고 싶은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오면 예수님은 언제나 열렬한 기도로서 유혹을 극복해나가셨습니다. 한 평생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했던 완벽한 순종의 삶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물가의 여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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