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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묵상] 예수의 세례와 나의 세례 ㅣ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8 조회수769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7년 1월 8일 주님 세례 축일

 주님 세례 축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고자,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세례로 시작하신 것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도 신앙인으로 새로이 살아갈 것을 약속한 세례 때의 다짐을 늘 기억하면서 충실히 살아가기를 촉구한다.


 ☆☆☆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15-16.21-22)


 After all the people had been baptized
and Jesus also had been baptized and was praying,
heaven was opened and the Holy Spirit descended upon him
in bodily form like a dove.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beloved Son;
with you I am well pleased.”

 


요한 세례자는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이제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예수님의 세례로써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몸소 세례를 받으시며 물을 축복하시어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하나로 통합하신다. 이제 물의 세례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우리는, 동시에 성령의 불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받아 누리게 된 것이다


 ☆☆☆


                                    예수의 세례와 나의 세례


  오늘 주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이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을 기념하는 날이다. 물론 단순히 세례를 받은 사실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세례가 담고 있는 엄청난 의미를 하나씩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미를 하나씩 짚어보기 전에 2004년 다해의 ’주님 세례 축일’에 선택된 오늘 루가복음의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루가복음에는 그렇지 않다. 마태오는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를 두고 요한이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세례사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3,19-20)을 삽입함으로써 누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요한의 제자가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요한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주장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점은 시간적 서술에 어긋나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이유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직후에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으로 일제히 보도한다.(마태 4,12-17; 마르 1,14)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시점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끝난 시점에 두고자 함이다. 그런데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이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앞당겨 기술하고, 그 다음에 예수의 세례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예수의 세례사건이 공생활시작의 계기가 됨을 시사하고 있다.


  이미 이 주간의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루가는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시점이나 장소로 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루가복음에서 예수의 세례사건을 공생활 시작의 계기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루가복음의 세례사건에서 마태오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기도하심’이 ’성령의 하강’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루가는 분명히 ’예수의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이 곧 예수님 공생활의 원동력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 루가가 보도하는 예수의 세례사건을 근거로 예수의 세례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하나씩 밝혀보자.

 

  첫째, 예수님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세례성사의 제정이다. 요한의 세례가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물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령과 불(16절)의 세례이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도’(21절) 죄인들의 대열에 함께 서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죄인인 백성들과 연대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사(聖事)로 제정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계시이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예수 위로 비둘기 형상으로 하느님 성령께서 하강하시고, 그 위에서 아들을 확인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짐으로써 온전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계시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마태 28,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시대를 선포하며 독자적인 성령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사건이다. 그래서 루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지시하신 것(루가 24,49)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능력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예수의 제2의 공현(公顯)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공현 대축일을 통해서 갓난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음으로써 온 천하에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경축하였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구세주를 위한 가능형이다. 이는 곧 한 아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 가능성은 다시금 무한한 다양성에로 열려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로서의 아기 예수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소신 있게 키워오고 지켜온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의식의 완성이다. 이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증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현은 세례를 통하여 공증(公證)된 셈이다.


  넷째, 예수님의 세례는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복음선포의 시작이다. 우리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듯이, 예수의 세례는 우리 세례의 원형이요 길잡이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복음선포의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세례를 받는 순간 복음선포의 공생활로 초대되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숙의 나이에 배령하는 견진성사를 공적인 복음선포에로 불리는 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로써 제정된 신약의 모든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을 예수의 삶에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루가가 생각하는 자기 고유의 시간과 공간개념이 적용된다. 예수님의 "오늘, 그리고 이 자리"(루가 4,21)가 바로 세례 받은 나의 "지금, 그리고 여기"이다. 예수님의 삶과 길은 곧 나의 삶이요 길이다. 세례 받은 나에게 다른 삶과 길은 없다. 예수께서 가신 광야(루가 4,1-13)도 갈릴래아(루가 4,14-19,28)도 예루살렘(루가 19,29-24,53)도 곧 내가 가야 하는 곳이다.

-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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