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 규빈이가 드디어 '복사'가 되었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8 조회수596 추천수9 반대(0) 신고
          우리 규빈이가 드디어 '복사'가 되었습니다

        



<1>

지난해 8월 <우리 규빈이가 '첫영성체'를 했습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또 한 번 내 조카딸 규빈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규빈이가 드디어 우리 성당 '어린이 복사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미사 '복사'가 되어 '보미사(예식이 원활하게 거행될 수 있도록 제대 주위에서 사제를 돕는 일)'를 하게 된 것이지요.

규빈이는 지난 5일(금요일) 저녁 소성당에서 거행된 평일 미사에 처음으로 복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처음이라 실수를 할 수도 있겠기에 엄마 복사들과 함께 했습니다. 엄마 복사가 옆에서 알려주고 도와주는 식으로….


▲ 어른 복사들과 함께 첫 복사를 하는 규빈이(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짝이 된 이지수 어린이  
ⓒ 지요하

그리고 '주님공현대축일'이면서 '연중제1주일'인 어제(7일) 대성당의 교중미사 때 '어린이 복사단 입단식(축복식)'을 치름으로써 우리 태안 성당의 명실상부한 복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첫영성체'를 한 어린이들 중에서 대개는 '성가정(가족이 모두 신자인 집)'의 아이들을 복사로 선발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청을 받아 선발하는데, 신청자가 많을 경우에는 '성가정' 기준이 적용되기도 합니다.

우리 규빈이는 지난해 8월 15일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어린이 복사 신청을 했습니다. 신청서의 부모 사인난에는 아빠와 함께 큰 엄마가 사인을 했지요.

복사 신청을 한 날로부터 규빈이는 토요일 오후의 어린이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 중에서 화·수·금요일의 저녁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며 복사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복사를 하는 화요일과 수요일의 저녁미사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례하며 선배 복사들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미사 후에는 작은 수녀님의 지도로 연습을 하곤 했지요.

규빈이는 평일미사 참례를 중심에 놓고 생활하는 큰 아빠 덕을 많이 보는 셈이었습니다. 큰 아빠가 평일미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례하니, 큰 아빠 차를 타고 편하게 성당을 갈 수 있는 거지요.

큰 아빠가 미사 후에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화요일)를 하거나 성가대 연습(금요일)을 할 때는 옆에서 구경을 하며 기다려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큰 아빠가 녀석을 집에 데려다 준 다음 다시 성당으로 달려가고….

이런 큰 아빠를 믿고 녀석이 제 임의대로 복사 신청을 한 것이지만, 엄마가 살아 있다면 평일 저녁에 성당을 가는 일이 더 수월했을 겁니다. 현재는 아빠 혼자 살고 있는 녀석의 본집에서 성당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이니….


▲ 첫 복사를 마친 후 소성당의 제대 앞에서 할머니와 함께  
ⓒ 지요하

첫영성체 이후 넉 달 동안 평일 저녁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며 복사 연습을 한 우리 규빈이가 마침내 복사복을 입었습니다. 5일 소성당의 저녁미사에 처음 복사를 한데 이어 7일 주님공현대축일 교중미사 중의 입단식에서 신부님으로부터 축복 안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우리 가족 모두) 제수씨를 생각했습니다. 제수씨가 살아 있다면 어린 딸의 예쁘고 대견스런 모습을 보며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고, 다시금 목울대가 아리더군요. 형제 자매들 중에서도 강은실 요안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을 겁니다.

7일 교중미사 후에 규빈이에게 슬며시 물었습니다. 첫 복사와 축복식을 하면서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고…. 녀석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웃기만 하더군요. 지난해 8월 첫영성체 후에 물었을 때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는데….

<2>

'복사(服事)'란 천주교회의 고유 용어로 '복종하여 섬기는 일, 또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선교사나 신부의 시중을 드는 사람과, 미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례에 주례자를 도와 예식을 원활하게 거행할 수 있도록 제대 주위에서 보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원래는 선교사나 신부를 수행하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복사라 했고, 남자 어른이 그 일을 했으나, 평신도 직책이 세분화되면서 오늘날 원래의 복사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부 복사로부터 분리된 미사 복사만 남게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사제관의 주방 일을 하는 사람을 일러 '식복사(食服事)'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부 복사에서 미사 복사가 분리된 시기, 다시 말해 성인 복사 대신 소년들이 미사 복사를 전담하게 된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복사가 미사 중에 사제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외워야 할 라틴어를 음역한 <보미사>라는 책이 1914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아 이미 그 무렵에는 소년 복사가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교중미사 중 '어린이복사단 입단식'에서 신부님의 축복안수를 받고...  
ⓒ 지요하

미사 복사는 오랜 세월 남자 어린이들이 전담해 왔으나, 1969년에 발표된 <로마 미사경본의 총 지침>에 "부제 이하의 무든 계층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는 시종직이나 독서직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에게도 맡길 수 있으며, 사제직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직무는 본당 신부의 재량대로 여성에게도 맡길 수 있다"는 규정(70항)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이 1994년까지 보류된 끝에 각 국가 주교회의에 이에 대한 권한이 이양됨으로써 우리 한국교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여자 어린이들도 미사 복사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후 미사 복사는 남녀 성인들에게도 확대되어 오늘날에는 남녀노소가 고루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본당에는 할아버지 복사단, 할머니 복사단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태안 본당의 경우는 제10대 백성수(시몬) 신부님 때인 1994년부터 여자 어린이들도 복사를 하기 시작했고(그래서 내 딸아이도 1996년부터 복사를 했지요), 현 제12대 구본국(베난시오) 신부님 부임 이후인 2004년부터 남녀 성인들이 복사 봉사를 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우리 본당은 지금 화·수·주일 저녁미사와 토요일 오후의 어린이미사만 어린이들이 복사를 하고, 주일·월요일 아침미사와 금요일 저녁미사는 여자 어른 복사들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성대한 주일 교중미사는 남자 어른 복사들이 봉사를 합니다. 토요일 저녁의 학생미사 겸 특전미사는 중·고생 복사들이 봉사를 하고….

전에 모든 미사 복사를 어린이들이 담당할 때는 새벽미사 복사가 어린이들에게는 참 고역이었지요. 새벽미사에 당번이 걸린 아이들을 새벽에 깨워 보내느라 어른들이 애를 먹는 일도 많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엄마 복사들이 모든 새벽미사 복사를 맡아주니 어린이 복사들은 이제 땅 짚고 헤엄치는 격입니다. 새벽에 눈 비비며 일어날 일이 없게 되었으니, 훗날 아무도 복사 시절을 고생스럽게 기억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3>


▲ 신부님의 축복 기도를 들으며 기쁜 미소를 짓고...  
ⓒ 지요하


우리 규빈이가 미사 복사가 됨으로써 우리 가족은 올해 84세이신 어머니와 처녀 시절 개신교 신자였던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사 복사 이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부터 시작해서 동생과 딸아이와 아들녀석, 조카녀석들이 하나같이 과거에 미사 복사를 했거나 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올해 복사가 된 규빈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벽에 눈 비비며 일어나는 고역도 감내했고, 성당 가까이 사는 탓에 당번 아이가 빠질 경우 급한 호출을 받고 성당으로 바삐 달려간 경험들도 갖고 있지요.

예쁜 복사복을 입고 첫 복사를 하고 입단식을 하는 규빈이를 보면서 근 50년 전 내 복사 시절을 잠시 떠올려보았습니다. 규빈이가 첫 복사를 한 날 미사 후에 수녀님이 아이들을 피자 집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입단식을 한 날 친교실에서 엄마들이 베풀어주는 축하연을 보면서 조금은 부러움을 삼키며 아릿한 감회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더군요.

나는 우리 본당의 공소 시절인 1959년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미사 복사를 했습니다. 우리 본당의 최초 복사인 셈이지요. 서산 본당에서 신부님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와서 복사를 하는 내 또래의 아이를 부러움과 질시의 눈으로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늘의 사무장 격인 성백석 루까 노인 복사님이 내게 앞으로 보미사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외우라고 작은 책 한 권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라틴어 미사경문을 한글로 옮겨놓은 책이었습니다.

당시는 미사 풍경이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신자들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앉아서는 미사경문을 '계응(주고받음)'으로 읊고, 사제와 복사는 라틴어로 계응을 하면서 미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복사는 당시에는 '고죄경'이라고 했던 '고백기도'와 자비송(기리에), 대영광송(글로리아), 거룩하시다(산뚜스), 천주의 어린양(아뉴스데이)를 비롯하여 미사경문의 모든 응송 부분을 라틴어로 외워야 했습니다.

또 당시에는(1964년까지) 사제는 오늘처럼 신자들을 마주보는 형태가 아닌 등진 형태로 미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복사가 하는 일이 지금보다 많았습니다.


▲ 새 어린이 복사들이 선배 복사들로부터 축하 꽃송이를 받고 함께 기념 촬영  
ⓒ 지요하

라틴어 미사 경문을 외우는 일은 참 고생스러웠습니다. 미사를 지낼 때 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주님의 기도'를 하시면 내가 마지막 구절 "셋 이베라 노쓰와말로(악에서 구하소서)"를 해야 하는데, 미사 중의 주님의 기도에서는 하지 않는 "아멘"을 해서 프랑스 신부님이 돌아서서 나를 쏘아보신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태안 공소가 1964년 8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신부님이 부임하신 후로는 몇 년 동안 모든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의 복사를 전담했고, 신부님의 오토바이 뒤를 타고 미군부대를 가거나, 무거운 미사가방을 메고 안면도 등 공소에 다닌 일도 많았지요.

그렇게 오래 미사 복사를 했으면서도 나는 한 번도 미사복을 입어보지 못했습니다. 미사복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고, 알았더라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본당에 복사복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71년에 부임하신 제3대 정용택(요한) 신부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쁜 복사복을 입은 요즘의 복사 아이들, 본당에서 복사단 어린이들에게 갖가지로 신경을 써서 대우해주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옛날 복사복도 입어보지 못하고 어렵사리 라틴말을 외워 복사를 했던 내 어린 시절이 절로 떠오르면서 정말 아릿해지는 감회를 머금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내 몫이었던 것을…. 어차피 초창기의 이런저런 어려움과 애환들은 당사자의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고(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했지만), 누가 알든 모르든 그런 시절을 거쳐 오늘의 발전과 풍요가 있으니,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관련
기사 - 우리 규빈이가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2007-01-08 15:08
ⓒ 2007 OhmyNews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