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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 고대 일본의 막부(幕府), 무사(武士), 왜구(倭寇) - 펌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0 조회수713 추천수5 반대(0) 신고

 

 

 

고대 일본의 막부(幕府), 무사(武士), 왜구(倭寇) - 펌

 

 

네이버 백과사전

 

 

막부 []

요약

중세 일본의 가마쿠라[鎌倉]~에도[江戶]시대 무가(武家)정치의 시행정청(施行政廳) 및 무가정권.

본문

중국에서 출정(出征) 중에 있는 장군의 본영(本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하였다. 즉 출정 중에 일정한 거소(居所) 없이 수시로 천막을 쳐서 진영을 둘러싼 것을 부(府)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명칭이 붙었다.

일본에서는 근위대장(近衛大將)의 거관(居館)을 지칭하였는데, 전화하여 근위대장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그 뒤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에 무가정치를 시작하고 1190년 우근위(右近衛)대장에 임명되자 그 거관을 이렇게 불렀고,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면서 장군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에도 후기에 이르러서는 장군 또는 장군의 거관뿐만 아니라 무가정권 그 자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무라이 [(시)]
요약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武士).
본문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 :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법[鎌倉幕府法]에서는 낭당(郞黨)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이 있는 무사를 일컬었고, 형벌도 낭당과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있어서도 대체로 상급무사를 지칭하였는데, 에도[江戶]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막신(幕臣) 중에서는 하타모토(旗本:에도시대 將軍家 직속으로 만석 이하의 무사)를 가리켰으며, 가치[徒]와 주겐[中間: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무사와는 구별하였고, 제번(諸藩)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무사 직위의 하나] 이상의 무사를 이렇게 간주하는 등,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왜구의 약탈과 격퇴

 

왜구 : 우리나라와 중국의 해안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옛 일본 해적.

 

왜구의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친 시기에는 거의 해마다 침입했고 피해도 막대하여 왜구가 이때부터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50년(충정왕 2)으로, 뒤이은 공민왕 때에는 115회, 우왕대(1375~ 88)에는 278회의 침입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14세기 후반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몰려오는 등 그 규모도 커졌고, 노략질하는 지역도 남부 해안지역에 그치지 않고 평안도·함경도 등 전국에 걸쳤으며,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횡행하는가 하면 개경을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을 이루어, 바다에서 조운선(漕運船)의 곡물을 약탈하거나 해안지역에 있는 조운 창고의 곡물과 군현의 관아 또는 부잣집의 재물을 노략질했으며, 내륙 여러 지역을 횡행하면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주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 해쳐서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가 왜구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무엇보다도 무수한 인명이 살해되고 재산을 잃었으며 노략질당한 것이 가장 큰 피해였다.

남부지역의 섬은 물론 해안지역에 살던 주민의 대부분이 피난함으로써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났으며, 당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해안지역 농토가 황무지로 바뀌었다. 아울러 바닷길을 통한 조운을 하지 못하여 육로로 조세를 운반하도록 했지만 왜구가 내륙까지 횡행한 까닭에 이 또한 원활하지 못해서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받았다.

 

고려 정부는 일본 정부가 왜구를 통제하도록 여러 차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 자체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이어서 큰 실효는 보지 못했다. 이에 따라 규슈 등지의 세력가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직접 왜구 금지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화포(火砲)를 개발함으로써 왜구 격퇴에 상당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진해에서 김속명이 3,000명의 왜구를 격파한 바 있고, 1376년(우왕 2)에는 최영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1380년(우왕 6)에는 금강 어구의 진포에 정박한 왜선 500척을  나세 · 심덕부 · 최무선 등이 화포를 써서 모두 불태웠으며, 이때 상륙하여 남부지역을 횡행한 왜구를  이성계가 지리산의 황산에서 무찌르는 대첩을 거둠으로써 왜구의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특히 강화된 수군이 왜구 격퇴에 크게 이바지하여 1383년에는 정지가 남해 관음포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1389년(창왕 1)에는  박위에게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를 소탕하도록 함으로써 왜구 침입은 뜸해졌다. 그러나 왜구는 결국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간헐적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1418년 이종무 등을 보내 쓰시마를 다시 정벌했으며, 지속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1426년(세종 8) 일본인들에게 3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등 무마 정책을 병행함으로써 왜구 침입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16세기에도 왜변(倭變) 또는 왜란(倭亂)으로 부르는 왜구 침입과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난동이 몇 차례 있었다.

      

 

이강길

 

 

 

귀소   김영동

이강길(u90120) (2006/04/25) :



배꼽 이미지들 올립니다.

이강길(u90120) (2006/04/25) :

이강길(u90120) (2006/04/25) :

이강길(u90120) (2006/04/25) : 위 부터 차례로...이런 사진 언제껀지 ...
배봉균(baeyoakim) (2006/04/26) : 파비아노 배꼽이미쥐 뜨게 해조서 고마워...파비아노는 역쉬 일등 조교야~...기특해라...일본 사무라이들 사진인데...전부 난장이들이쥐...ㅉㅉㅉ...100년~150년 전 사진일고 같애.
박영호(park05) (2006/04/26) : 155년전사진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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