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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춘문예 심사에 처음 참여하고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0 조회수606 추천수4 반대(0) 신고
   신춘문예 심사에 처음 참여하고 
     15년의 낙방 고초를 소개하는 것은 후배 문학도들에게 가혹한 일일까
  



<1>

올해 처음 모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에 참여해 보았다. 본심을 한 건 아니고 예심을 했다. 그래도 '귀하를 2007년도 00일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합니다'라는 신문사 사장의 '위촉장'까지 받았다.

예심을 하러 가면서 혹 나보다 후배 작가들이 본심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묘한 우려를 가졌으나, 유명한 정상급 선배 작가들이 본심을 맡는다는 것을 알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신문사의 회의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다섯 시간을 '고심(苦心)'을 거듭하는 일에 매달렸다. 점심식사 시간을 빼면 4시간 20분 정도 일을 한 셈이다. 두 명이 50여 편씩을 읽고 다섯 편씩, 모두 10편을 본심에 올리는 일이었다.

나는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정독을 하고 싶었으나(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모두 컴퓨터로 작업을 한 원고들이어서 한결같이 읽기는 편했으나 두어 장 읽다가 내려놓는 원고들도 있었고, 대개는 속독을 해야 했다.

정독을 한 작품들도 있지만, 모든 작품을 꼼꼼히 정독하지 않고 속독을 한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겨우 두어 장 읽고 내려놓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상하게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일단 내려놓고 나서도 미안하고 미심쩍어 다시 집어들고 좀더 읽어보는 일을 거듭했다.

모든 작품을 꼼꼼히 정독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계속적으로 이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라는 의문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속독을 한 다음 내려놓은 원고들, 겨우 두어 장 읽고 내려놓은 원고들 중에 진짜로 좋은 작품이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내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 내려놓은 원고들에게로 자꾸만 눈이 갔고, 애처로움을 느껴야 했다. 그 애처로움 때문에 한숨을 삼키면서 일을 한 탓인지 내가 제일 오래 시간을 끌었다. 시 부문 예심위원들은 오후 2시쯤 일을 마치고 먼저 돌아갔고, 소설 부문의 다른 한 분 예심위원은 일을 마친 다음 한참이나 내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여덟 편을 본심에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두 분 본심 위원들의 시간 사정을 배려하려는 신문사의 요구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후배 작가인 다른 예심위원이 네 편을 올리기로 해서 나는 여섯 편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본심에 올리고 싶었던 두 편을 내려놓은 것이 못내 아쉬워 또 한번 한숨을 쉬어야 했다.

본심은 예심 다음날(15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미 당선작은 결정이 되었을 것이다. 신문사는 본심을 한 그 날 저녁에 당선 작가에게 통지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누군지 모를 당선 작가는 이미 통지를 받고 까무러칠 뻔한 순간을 겪고 나서 지금 한창 황홀경 속을 사는 기분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낙선자들 중에는 오늘도 전화기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하며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겪는 이들도 있을 테고….

<2>

예심을 하면서, 내가 옛날에 어떻게 신춘문예를 통과했는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옛날에 신춘문예를 잡았다는 사실이 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신춘문예는 실력만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실력을 갖춰야 하지만 참으로 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예심을 하면서 실감하자니, 괜히 서글퍼지는 마음이기도 했다.

내가 신춘문예에 도전하던 시절에는 거의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썼다. 그리고 세로쓰기를 했다. 그 시절에는 원고지 5매가 승패를 가름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예심위원이 도입부 5매를 읽고 예심 통과 여부를 결정한다는 얘기였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겨우 5매 정도만 읽히고 탈락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나는 혹시 옛날처럼 원고지에 육필로 쓴 작품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머금기도 했다. 그런 원고를 대하게 되면 참 반가울 것 같았다. 그런 원고를 만나게 되면 반가운 정을 안고, 더욱 기대를 품고 꼼꼼히 정독을 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원고지에 육필로 쓴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두툼한 원고가 하나 있어서 기대를 품었지만 막상 차례가 되어 집어들고 보니 역시 컴퓨터로 작업을 한 컴퓨터 원고지 글이었다.

지금은 모두 컴퓨터로 작업을 한 원고들이어서 읽기가 훨씬 편하다. 그야말로 속독이 가능하다. 옛날처럼 5매 정도 읽고 내려놓는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옛날 원고지 시절 도입부 5매가 운을 가른다는 말이 뇌리에 박혀 있는 나로서는 원고지 5매 분량에 해당하는 A4 용지 한 장 정도를 읽고 결정을 하기가 싫었다. A4 용지 한 장이면 200자 원고지 5매 이상을 보는 셈이니, 비록 속독일망정 최대한 글 전체를 눈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운이 많이 작용하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예심을 하면서 또 한 가지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본심을 맡은 모 선배 작가의 등단 시절 일화였다. 그는 1973년도 00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을 했는데, 거기에는 천운의 작용이 있었다.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인 모씨(문학평론가)가 예심 작업을 모두 마치고 퇴근하려고 코트를 입으면서 광주리 안에 쌓여 있는 예심 탈락 원고들을 보자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맨 위에 있는 원고를 집어들고 몇 장을 읽어보았다. 분위기 있는 색다른 문체에 이끌린 그는 그 원고를 다 읽었고, 예심을 한 다른 문화부 기자의 사인을 지우고 자기 사인을 한 다음 그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결국 그 작품은 당선이 되었고, 그 해 각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 소설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 일화를 잘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예심 탈락 작품들이 애처롭게 보였고, 일단 내려놓았던 작품들을 다시 집어드는 수고를 거듭해야 했다.

<3>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19세 청소년 시절이었다. 40일 동안에 1080매의 장편소설을 써서 당시 유일한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의 제1회 장편 공모에 응모했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한 단계 위인 '당선 후보'가 되었다(이동하 선생이 당선, 김원일 선생이 준당선을 했고, 당선 후보에 올랐던 오성찬 선생과 나도 훗날 다른 경로로 등단의 꿈을 이루었다).

그때 내 작품이 당선 후보에까지 오른 바람에 나는 내 가능성을 믿었다. 이내 작가가 될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내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부문)를 잡기까지에는 장장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없이 고배를 마시며 때로는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뽑아놓은 작품을 시대상황을 민감하게 살피는 편집국장이 비토를 해버린 사연도 있었고,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당선시킬 수가 없었다"는 심사위원의 말을 듣고 "선생님, 그 작품은 작년에 신문사 실수로 분실되어 심사위원 손에도 가지 못했던 작품입니다"하니 "그래요? 작년에 그 작품을 보았더라면 당선이 되었을 텐데"라는 말을 들은 기가 막힌 사연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요즘의 문학도들은 시대상황과 관련하는 고민도 할 필요 없고, 시대상황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이 문학도들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테지만, 나는 시대상황으로부터 피해를 보았던 과거지사를 뼈아프게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1974년의 일이다. 유신 초기, 민청학련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면서 폭압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신춘문예 시즌의 막바지인 12월의 요즘 무렵이었을 것이다.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한 선비가 물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둑 위에 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선비는 이윽고 제법 큼지막한 고기 한 마리를 잡아 올렸다. 그는 좋아하며 그 고기를 낚시 바늘에서 떼어 옆에 있는 다래끼에 던졌다.

그런데 그 물고기는 다래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물로 떨어져버렸다. 그 순간 나는 잠이 깨었다. 잠이 깨는 순간 '떨어졌구나!'라는 외마디 소리가 내 뇌리를 아프게 찔렀다.

그때도 나는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1975년도 00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는 모두 580편이 접수되었다. 30편이 본심에 올랐고, 그 중에서 4편이 최종심에 올랐는데, 심사평은 내 작품을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도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의 세월이 흐른 1979년 어느 날, 내가 자주 찾아뵙던 한 분 소설가 선생님 댁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였다. 00일보 1974년도 신춘문예 당선 작가인 선배 작가도 동석을 했는데 그 선배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1975년도 00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의 '비화'를 들려준 것이었다.


 

 세 분의 심사위원이 당선작으로 결정한 작품을 편집국장이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비토를 한 바람에 문학담당 기자가 심사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최종심에 오른 나머지 세 편 중에서 한 편을 고르고 심사평도 그 기자가 썼다는 얘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1974년 12월 중순 무렵의 어느 날 밤에 꾸었던 꿈 장면이 선연히 떠올랐다. 선비가 낚시에서 떼어 다래끼에 던진 물고기가 물로 떨어지는 순간 잠이 깨면서 동시에 '떨어졌구나!'라는 외마디 소리가 내 뇌리를 찌르던 아픔이….

또 한해의 신춘문예 시즌이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이다. 신춘문예를 지속하는 일간지마다 이미 심사를 마치고 당선작을 결정하여 당선 작가에게 통지를 했을 것이다. 당선 작가들은 참으로 감미로운 시간 속에서 내년 1월 1일을 기다리며 새롭게 결기를 가다듬을 테지만, 다른 수많은 문학도들은 아픈 체념을 삼키거나 아직도 전화기 신호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당선했을 때는 전화 아닌 전보를 받았지만….

일간지들의 신년호가 나오려면 아직 보름 가까이 남았지만,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미리 축하를 보내고 낙선하신 수많은 문학도들에게 위로를 드리며, 내 15년 낙방 고초를 소개하는 것이 다소 가혹한 일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참고로 삼으시기를 부탁드린다.  


  2006-12-18 15:22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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