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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새 무안하고도 부끄러운 나이가 되었구나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1 조회수739 추천수11 반대(0) 신고
       어느새 무안하고도 부끄러운 나이가 되었구나 
              초로의 세월로 들어서고 보니... "인생 별거 아니다"





등단 초기, 그러니까 1980년대 초·중반에는 소설가 박범신 선배와 종종 어울렸다. <소설문학>이라는 잡지사에서 '1982년도 신춘문예 당선작가 좌담회'라는 것을 열었는데, 그 좌담회의 사회를 박범신 선배가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박 선배와 알게 되었다.

당시 박범신 선배는 경기도 안양에서 살았다. 내 누님이 안양에서 사는 고로 종종 안양에 갈 적마다 박 선배와 만나다 보니, 역시 안양에 둥지를 틀고 있는 윤흥길, 김상렬 선배와도 종종 어울리게 되었다. 박범신, 윤흥길 선배와 함께 배낭을 메고 안양의 수리산을 올랐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무렵 어느 날 김상렬 선배의 아파트에서 나이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보다 두 살이 위인 박범신 선배는 그때 서른아홉 살로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박 선배의 융융(融融 : 화목하고 평화스럽다)했던 30대 시절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였다. 박 선배는 말했다.
  
"내가 곧 마흔이 된다니, 생각할수록 불쾌해."

나이 마흔을 불쾌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이 김상렬 선배의 입에서 나오고, 두 선배 사이에 이런저런 재미있는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나는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사실은 나도 나이 마흔이 멀지 않은 세월이었다. 30대 후반 세월에 이르도록 장가도 들지 못하고, 박범신 선배가 누리고 있는 융융함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내가 정작 나이 마흔을 두려워하고 불쾌하게 여겨야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얘기를 할 자격조차 없지 싶었다.

그런데 그 후로 금세 마흔의 나이로 접어든 나는, 여전히 허랑(虛浪 : 언행이나 상황 등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다)한 가운데서도 새롭고도 획기적인 시절을 맞았다. 1월에 결혼을 하고, 11월에 첫 아이를 얻었다. 정말이지 나이 마흔을 먹던 그 해는 내게 좋은 시절이었다. 마흔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는지 몰라도 불쾌함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로부터 20년의 세월이 바람같이 흘렀다. 어지간히도 다사다난했고, 된비알 너덜겅에서 이리저리 돌부리에 채인 통에 참으로 순조롭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바람 같다는 생각뿐이다. 아무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인생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지금은 박범신 선배와 적조하게 살고 있지만, 종종 그를 지면이나 방송매체에서 대할 때는 옛날 생각이 난다. 특히 그의 깊이 있는 철학과 너른 사유의 숲이 담겨 있는 최근의 작품들을 읽을 때는 더욱 그 생각이 난다. 20여 년 전 나이 마흔이 불쾌하다고 했던 얘기….

그런 박 선배도 이제는 60대 초반, 초로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그 선배가 2년 전 60세로 접어들 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한 마음이지만 혹 그를 만나더라도 그걸 묻지는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없었을지 모르니까….

나도 이제 인생 60줄로 접어들었다. 만으로는 아직 59세라고 말하지만, 만 나이를 내세우면 어쩐지 나 자신이 측은해지는 느낌이다. 우기지 말라는 핀잔도 듣는다. 마누라의 핀잔을 듣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내 나이가 그대로 보이는 듯해서 마누라와 싸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너무 무안하다. 무안하여 한심하고, 한심하여 무안하다.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으니 염치도 없다. 나이 예순은 무안하면서도 염치없는 나이임이 분명하다. 생각하면 그저 무안하고도 염치없을 뿐이어서 아예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 이미 생각일 테지만….

그런데도 나는 무안하고도 부끄러운 제목으로 내 나이와 관련하는 글을 쓰고 있다. 우습다. 얼마나 염치를 불고 하는 짓인가. 하지만 이미 사사로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쪽으로 이골이 날 때로 난 탓에 그 관성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이순(耳順)의 세월로 접어들었으니 그저 귀를 열고 남들의 얘기나 잘 듣는 것이 어울릴 터이건만….

<2>

거리에서나 어디에서 종종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본다.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내 모습에서 선친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점점 더 선친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나는 외탁을 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왼손잡이인 것도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다. 일찍이 외탁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내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느끼게 될 줄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아버지의 지금 내 나이 시절 모습이다.

언젠가는 거리를 걷다가 어느 가게 앞의 거울에 고스란히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아! 하고 탄성을 발하기도 했다. 선친의 생전 모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이나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내 모습에서 선친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반가움을 가슴 가득 안다가, 그것이 실은 그리움이어서 잠시 눈물을 짓기도 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점점 더 선친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사실에서 묘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선친의 모습만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선친의 심성도 닮아 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선친의 심성을 닮아 가기에 내 모습에서, 이런저런 본새와 동작들에서 선친의 모습이 절로 나타난다는 생각도 한다.

선친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신 분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매우 무능한 분이었고, 그런 만큼 어떤 일에도 욕심이 없었다. 가난이라는 말은 물질적인 궁핍이나 빈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욕심이 없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선친은 평생을 물질적인 가난 속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사셨다.

선친이 말년에 힘들여 하신 일은 시를 짓는 일과 동심의 세계를 그려내는 일, 즉 동화를 짓는 일이었다. 선친에게 가장 큰 소망은 자신이 청년 시절에 스스로 찾아 갖게 된 천주교 신앙을 올곧게 유지하여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하느님 신앙을 모든 자녀에게 잘 물려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난한 마음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사셨기에 선친은 간경화를 앓는 극심한 병고 자리에서도 늘 묵주를 손에 쥔 채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실 수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웃음을 지으실 수 있었다.

운명하시기 하루 전날 선친은 두 가지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한 가지는 아내를 속여서 가족들을 웃기신 일이고, 또 한 가지는 어떤 꿈 때문에 스스로 웃으신 일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셨다. 무슨 음식을 자시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반갑게 일어서서 부엌으로 가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음식을 어떻게 먹을 거라고, 내 말에 속아서 저렇게 반갑게 나가는 저 할망구, 순진 맞기가 세상 일등이다."

아버지의 그 말에 가족들은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선친은 한참을 주무시고 나더니 웃음을 지으셨다. 왜 웃으시느냐고 셋째 딸이 여쭈니 이런 말을 하셨다.

"꽃바구니를 든 아이들이 여러 명이나 내 앞에 와서 서로 자기 꽃을 받으라고 하니, 누구 꽃을 받을지 곤란해서 웃은 거여."

나는 주변의 이런저런 병고자리와 죽음자리를 접할 때마다, 그리고 여기저기로 문상을 갈 때마다 선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다.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르곤 하는 선친의 그 모습은 어느덧 내가 소망하는 하나의 '목표' 같은 것으로 내 가슴에 자리하게 되었다.

<3>

어느새 나도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66세라는 아까운 연세로 작고하신 선친을 생각하면 더욱 겸허해지는 마음도 갖게 된다. 그리고 가난한 마음과 하느님 신앙으로 말미암은 선친의 더없이 평온하면서도 의연하셨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 자식들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선친으로부터 가난한 마음과 하느님 신앙을 그런 대로 잘 물려받았지 싶다.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그것을 내 자식들에게도 잘 물려주고 싶다. 그리하여 내 자식들도 먼 훗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모습만 닮아 가는 것이라, 아버지의 심성까지 닮아 가는 것을….

초로의 세월로 들어서고 보니 인생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성당에서 미사 때 신부님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한데, 정말 인생 별거 아니다. 세월은 바람같이 흐르고, 지나고 보면 더욱 쏜살같고, 그래서 더더욱 덧없는 것이 인생이다.

참으로 어렵사리 소설가 명색을 갖게 되었을 때 어느 지면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내가 설사 불후의 명작을 쓰더라도, 그래서 내 이름과 작품이 천 년 만 년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시간으로 볼 때는 풀잎에 맺혔다가 스러지는 이슬방울에 불과하다. 그런 이슬방울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 나를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는 작품을 쓰겠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겠다는 뜻으로 한 말인 것 같은데, 그 후 나는 작가 명색 25년이 지나도록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뚜렷한 작품도 쓰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작가로 머물고 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이순의 나이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작가로서의 위기의식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거의 체념과 포기 상태에 이른 것 같다. 때로는 70세에 <커피 잔 너머>라는 빼어난 작품을 쓴 홈스와 70고개를 넘어 <부활>을 쓴 톨스토이, 80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한 괴테를 떠올려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면구스러움도 함께 느낀다. '내가 어찌 감히'라는 생각에 스스로 무안한 웃음을 짓는다.

한때는 초조감이며 위기의식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것에도 초연하지 싶다. 아직 초로이니 작가 명색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좀 남아 있지만, 인생 별거 아니듯이 그것 또한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초연함 속에서 욕심 내지 않고 작품 집필에 열중하다가 보면, 그것이 또 다른 생명의 불꽃이 되고, 그리하여 어느 순간엔 별거 아닌 것이 아닌 일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집착하여 급급하고 싶지는 않다.

무욕(無慾) 속에서 작가 명색(작가 정신과 자존심)을 올곧게 유지하며 내 생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할 뿐이다. 내 생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내 몫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아가며 선친의 마지막 모습을 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룬 것 없는 무안하고도 부끄러운 나이에 이르러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내 현실 조건이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결코 내 현실 조건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2007-01-10 14:4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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