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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친의 유고시 '바람 뫼뿐이어라' 이야기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3 조회수558 추천수6 반대(0) 신고
          선친의 유고시 '바람 뫼뿐이어라' 이야기 
                     선친 별세 20주년에 사촌형수님은 서예작품으로 입선
    

 

 




▲ 1986년 <흙빛문학> 제4집 '고 지동환 선생 추모특집'의 앞머리  
ⓒ 지요하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86년 2월 7일 선친께서 66세라는 아까운 연세로 별세하신 후 유품을 정리할 때였다. 몇 편의 유고 시들 중에 '바람 뫼뿐이어라'라는 시가 있었다. '나의 사세(辭世)'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시였다.

선친의 마지막 유고 시일 터였다. 나는 그 시를 손에 들고 읽는 순간 가슴 저미는 듯한 아픔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 고장의 문학지 <흙빛문학> 제4집에 '고 지동환 선생 추모특집'을 꾸몄다. 내 선친께서 우리 고장의 선구(先驅) 문인이신 까닭이었다. 선친은 1980년 회갑 시에 우리 고장 최초 개인 시집인 <장명수 산조(長明水 散調)>를 출간하신 분이고, 1984년 <소년>지 11월 호에 동화 '가짜 호랑이'로 추천(박홍근 천)을 받으신 분이었다. 또 1981년 <흙빛문학회> 창립을 고무 지원하시고 명예회원으로 <흙빛문학> 1·2·3집에 여러 편의 시와 동화들을 발표하셨으니 선친의 '추모특집'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흙빛문학> 4집에 선친의 '추모특집'을 꾸미면서 특집 앞머리에 회갑 때 찍으신 근영(近影)과 함께 선친의 마지막 유고 시인 '바람 뫼뿐이어라'를 육필 복사하여 그대로 올렸다. 선친의 육필 형체를 책 안에 담아서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으로 한 일이었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난 1993년 나는 선친이 남기신 26편의 동화 작품들 중에서 절반인 23편을 모아 <팥죽할머니와 늑대>라는 동화집을 펴내었다. '산하출판사'에서 만든 그 책은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추천 도서가 되면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다음해인 1994년에는 '충청남도문예진흥기금'의 도움으로 선친의 유고 시집 <바람 뫼뿐이어라>를 출간하면서 그 시집의 앞머리에 다시 한번 마지막 유고 시의 육필을 사진 찍어 올렸다.

그리고 1997년 선친의 나머지 동화작품 13편을 묶어 '글벗사'에서 유고 동화집 <까마귀 할머니와 파랑새>를 펴냄으로써 선친의 유고 작품들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소임을 일단 마무리했다.

그런 다음에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차츰 선친의 시들에 대한 기억을 잊어갔다. 한때는 선친의 생전 시집에 수록된 '바람소리'라는 시와 함께 마지막 유고 시 '바람 뫼뿐이어라'를 외워서 적당한 자리에서 능숙하게 낭송을 하기도 했으나 어느덧 두 편 모두 내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내 머리에 남아 있는, 내가 능숙하게 암송할 수 있는 30여 편의 시들은 20대 청년 시절에 외운 시들이다. 30대 이후에 외운 시들은 모두 쉽게 잊어먹고 말았다.)

그러다가 또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난 2004년 5월, 나는 사촌 둘째 형님의 고희연 자리에서 다시 한번 선친의 마지막 유고 시를 접할 수 있었다. 사촌 셋째 형수님이 노래를 부르는 순서였는데, 형수님은 노래 대신 시 낭송을 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외울 수 있는 유일한 시라고 했다. 그리고 형수님은 작은 시아버님의 마지막 유고 시 '바람 뫼뿐이어라'를 암송했다.

나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사촌 작은 형수님이 내 선친의 유고 시를 외우고 계실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조금도 막힘이 없는 형수님의 그 암송을 들으면서 나는 감격했고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 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아버님의 현존 같은 것을 느꼈다. 사촌 작은 형수님이 신혼 초부터 작은 시아버님을 좋아하고 존경해오신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선친 별세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는 지금에도 내 선친께서 조카며느리의 의식 속에 각별히 현존하고 계신 사실을 느끼고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내게 좋은 질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2005년 사촌 작은 형님 내외분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작은아버지의 천주교 신앙을 함께 나눈 유일한 조카 내외가 되었다. 2003년 큰아들이 죽음 직전에 대세(代洗)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작은 시아버님에 대한 형수님의 존경심도 작용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2005년 9월 4일 태안 성당에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은 사촌 작은 형님 내외분  
ⓒ 지요하


▲ 내 사촌 작은 형수님(솔빛 김정자)의 서예작품. 내 선친의 마지막 유고 시를 쓴 것인데, 올해 제9회 '안견미술제'에 출품하여 입선을 했다.  
ⓒ 지요하

그런데 사촌 작은 형수님은 작은 시아버님의 마지막 유고 시를 외우고 사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애송시가 되어버린 작은 시아버님의 마지막 유고 시를 서예작품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형수님은 큰아들을 잃은 지난 2003년부터 서예공부를 시작했다. 서예를 배우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고 자신을 위안하며 사시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던 형수님은 고장의 서예단체에 참여하여 지난해부터 이런저런 전시회에 작품을 선보이더니, 올해에는 지난가을 제9회 '안견미술제'에 서예작품을 출품한 모양이었다.

형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올해 안견미술제에 출품한 서예작품이 '입선'을 했다고 했다. 공모전에 처음 출품을 했고, 생전 처음 입상 경험을 갖게 되었노라고 했다. 서산시문화회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으니(전시 기간이 12월 6일까지이니), 시간이 되면 한번 가서 보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형수님께 일단 축하 인사를 건넨 다음, 지난 4일 오후 퇴근한 아내와 함께 서산시문화회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제9회 안견미술제 입상 작품들 중 우선 서예작품들을 보다가 형수님의 입선 작품을 발견한 순간 다시 한번 큰 감격과 고마움을 느꼈다. 형수님의 서예작품은 내 선친의 마지막 유고 시 '바람 뫼뿐이어라'를 쓴 작품이었다.

형수님께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축하를 하고 고마움을 표하니 형수님은 앞으로 더 좋은 글씨로 작은아버님의 유고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아버님은 앞으로도 몇 번은 더(어쩌면 계속적으로) 조카며느님의 서예작품 속에서 '현존'을 구가하실 터였다.

나는 그때 문득 올해가 아버님 별세 20주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버님 별세 20주년에 조카며느님이 아버님께 참 좋은 선물을 안겨드렸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덕분에 나도 아버님 별세 20주년을 각별한 마음으로 지내는 셈이 되었고….

다시 한번 사촌 작은 형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선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20년 전 <흙빛문학> 4집의 '고 지동환 선생 추모특집'에 썼던 글 하나를 소개한다.


▲ 내 선친의 유고 시를 조카며느님은 붓글씨로 쓰고, 며느리는 그 서예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고...며느리는 "생전의 아버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서예를 하시는 형님 덕분에 아버님의 유고 시를 서예작품으로 보게 되니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  
ⓒ 지요하


아버님을 그리며

<흙빛문학> 제4집에 '추모 특집'을 꾸미기로 한 합의에 따라, 고인의 유고 작품들을 찾아보고자, 부친께서 생전에 몸소 정리해 놓으셨던 유품 곽을 뒤적이던 중 '나의 辭世'라는 네 글자가 적힌 흰 봉투를 발견하고 잠시 동안 망연자실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세상과 이별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적은 그분의 시문을 읽고 또 읽으면서 끓어오르는 슬픔에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시인이시고자 했고 시인이셨던 그분은 이렇게 세상을 하직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도 시문으로 적었다. 당신의 자리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보며 그리고 그 크고 깊은 병고 중에서도 마음을 모으고 맑은 정신으로 시문을 적어놓으신 그분의 냉철함과 의연함이 오히려 어떤 처절함으로 가슴을 치는 듯 느껴져서 더욱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이 언제 무렵에 이 '詩文 辭世'를 적어놓으셨는지 짐작할 길조차 없다. 어쩌면 소슬한 가을 바람이 낙엽 한 잎 데불고 좁은 울안으로 들어와 뜨락에서 처연히 스러지던 그 무렵이 아니었을지….

그때 그분은 방문을 열고 앉아 가을 바람 스러지는 뜨락을 내다보고,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동네 조무래기들의 정다운 음성들을 귀담아 듣고, 한 조각 보이는 푸른 하늘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을 망연히 바라보시다가… 그리고 이 글을 적으셨을까? 그때의 그 심경, 그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세속의 눈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해도 좋을 그 이른 죽음 자리, 심신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에의 그 지극한 소망, 넘치는 신앙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자식들에게 하느님에의 신앙과 가톨릭 정신을 굳건하게 심어주신 그분. 자녀들에게 예술적 소양과 재능을 나누어주시고 특히 큰아들에게 '가난'을 가르쳐 주시고 지니게 해 주신 그분. 진정한 동화 작가이기를 원하셨고 동화 작가이셨던 그분. 외손주들과 동네 아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면서 친손주를 안아보지 못함을, 그 허전함과 섭섭함을 단 한 번 말씀하셨던 그분. 며느리로부터 진지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세상 떠나시는 것을 단 한 번 서운해 하셨던 그분….

그리고, 육신을 죄어 누르며 죽음이 다가오는 그 극심한 병고 자리에서도 늘 자신이 스스로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기도해 주기를 청하시고, 묵주를 감아 쥔 손을 항시 이불밖에 내놓으시고, 그리고 운명하시기 하루 전까지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시며 농담도 하시고 함께 웃기도 하시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그저 다만 조용히, 마치 잠드시듯 운명하신 그분. 얼른 가까이 귀를 대어보고 손목을 짚어보고서야….

참으로 어여쁜 선종이었으니 그분이 생전에 '詩文 辭世'에 바라고 읊은 바대로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 안길 때 꽃은 웃고 산새 노래 불러 그를 맞았으리"라고 믿어도 좋으리.

오직 착한 심성으로,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벗하는 동심으로, 그리고 맑고 깊은 시심으로, 뿐인가 깊고 굳은 신앙으로 생애를 다하였으니, 그가 이승에서 청춘 시절부터 끝날에 까지 변함없이 믿었던 바대로 '사후세계'가 있고 '상선벌악'이 있다면 그는 정녕코 그 믿음의 보람 속으로 들었으리라 믿어도 좋으리….

하지만 참으로 허무하게 그분을 떠나 보내고 난 뒤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하고 섧다. 그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뜨거운 정이 슬픔과 어우러져 무시로 가슴에 무놀져서, 방에 망연히 앉았다가 일어나 서성이고 먼 하늘을 보며, 한숨짓고 눈물을 흘림은 아직 깔축이 없다. 침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먼 땅으로 훠이훠이 여행을 하고 왔음에도….

생전에 그분이 쓰셨던 방을 차지하고 살면서, 그분이 임종 때 입으셨던 겉저고리를 벽에 걸어놓고 그분 보듯 보며 때로는 내음을 맡으면서, 그분이 임종 직전까지 입으셨던 잠옷을 내 것 삼아 입고 그분이 누워 계셨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면서, 다만 꿈에서만이라도 그분을 다시 뵈옵기 원하건만, 그분은 단 한 번 꿈에 나타나시고 더는 오시지를 않는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셔서 마루를 오르시고 또 이 방에 드셨는데, 그 후로는 어디에 계시는지 기척도 없고 알 수가 없다. 이 방에 드셨으니 지금도 이 방 안에, 내 곁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하지만….

내게 눈물 많이 흘릴 수 있는 가슴을 주신 그분. 눈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임을 알게 해 주신 그분. 그 죽음의 자리에서도 아들의 문운을 빌어주시고 또 그리 되리라 말씀하신 그분….

그분이 떠나가시고 난 뒤에야 그분을 더 많이 자세히 알 것만 같은 이 마음은 또 무엇인지…. 그분의 시와 동화들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고, 이제야 그분의 작품 세계가 깊고 너르고 실로 만만찮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죄스러움인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대문 밖에서는 동네 조무래기들의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그분이 계시리라는 생각에 시끄러워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분 생전에 세상사는 재미를 제대로 만들어 드리지 못한 내 불효를 한하고 한하는 이 눈물을 나는 평생을 두고 씻을 길 없다.  


  2006-12-15 14:39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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