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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1) [생활속의 이야기] 오리무중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5 조회수598 추천수6 반대(0) 신고

 

지난 해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서였어요.

저녁상을 차릴려고 보니 김치가 떨어졌더라구요.

먹던 김치는 마트에서 사온 김치였지요.

그동안 김치냉장고에 고히 모셔두었던 김장김치를 이제 좀 개시해야겠다고,

지금쯤 아주 맛있게 알맞게 익었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김치냉장고 뚜겅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김치통의 뚜껑이 부웅 부풀어 올라 있었고 느낌이 이상했어요.

통을 열어보니 국물은 홀딱 넘쳐버리고 김치는 이미 신맛이 나더군요.

아니 이게 웬일인가?

김치가 벌써 시다니......

 

살펴보니 김치냉장고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누가 코드를 뽑아버린거냐고 비명아닌 비명이 절로 나오는 거였어요.

신김치를 유난히 싫어하는데 김치 네 통이 다 시어버렸다 생각하니 그만 흥분하고 말았죠.

 

<누가 그랬어?

누가 김치 냉장고 코드를 뽑은거야?

언제부터 뽑아놓은 거야?>

 

벽에 두 개의 콘센트가 있어 하나는 냉장고 코드를 꽂았고, 한 개의 콘센트엔 멀티콘센트라고 하여 여러개의 코드가 달려있는 걸 연결해 놓았는데, 김치냉장고를 비롯하여 밥솥, 전자레인지, 두 개의 주전자, 토스터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론 구멍이 한 개가 부족하여 토스터기를 사용할 땐 다른 한 개를 빼고 꽂았다가 다시 뽑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욱  사용치 않던 토스터기를 그 얼마전부터 딸이 빵을 굽는다고 여러번 사용했었거든요.

그순간 범인(?)이 딸이라고 난 단정짓고 말았습니다.

왜 사람이 미운털 박히면 발뒷굼치가 삶은 계란처럼 예뻐도 밉게 보인다고, 그무렵 딸이 미운 짓을 많이 했던 터라 더 그랬나 봅니다.

 

딸에게 전화한다고 하니 남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냐고 전화하지 말라고 퇴근하면 물어봐도 되지않냐고 하는데, 귀가할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니가 토스터기 쓴다고 김치냉장고 코드 뽑았었냐고 다짜고짜 물으니 뽑긴 무슨 코드를 뽑냐고 성질을 내더군요.

그럼 도대체 누가 뽑았단 말인가?

밥솥은 늘 사용하므로 그 선만 확실히 알고 사실 다른 선들은 어떤 게 어느선인지 잘 몰라 선을 늘여서 일일히 확인해보니 일곱개의 전자제품이 다 꽂혀 있었습니다.

 

그럼 선을 빼지도 않았는데 김치냉장고가 왜 꺼져 있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선은 제대로 다 꽂혀있었는데 누가 불 들어오는 누름단추를 눌러 버린 겁니다.

그럼 누가 눌러버린 걸까?

밥솥단추만 내가 껐다 켰다 했지 다른 선은 건드리지 않아 늘 불이 켜져 있었을텐데....

김치를 다 버렸다고 생각하니, 시어빠진 김치를 겨우내 먹을 생각을 하니 순간적으로  잃어버렸던 이성(?)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코드를 뽑은 일이 없다.

냉장고의 선은 벽에 꽂혀있으니 제외하고 멀티콘센트에 꽂혀있는 선은 모두 여섯 개다.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밥솥, 주전자 두 개, 토스터기.>

 

데팔 주전자도 큰 것은 남편이 매일 차 끓이느라 사용하고, 작은 것은 커피물 끓일 때 아들이 가끔 사용하는 것입니다.

딸과 나는 가스레인지에 스텐 주전자로 후딱 끓이는 게 편해서 전기주전자는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우리집은  주전자도 식구마다 각자 놀고 있구만요.

 

나는 셜록홈즈처럼 아니 괴도 루팡에 나오는 소년 탐정처럼 추리를 시작했죠.

추리에 추리를 계속하여 루팡의 은거지 에이뀨 성(바늘바위 성)을 찾아내는 소년탐정처럼 말이죠. 아니면 형사 콜롬보처럼 말이죠.

 

<아무도 코드를 뺀 일이 없고 뺄 필요도 없었다.

모든 선은 다 그대로 꽂혀 있다.

누름단추를 누른 사람도 없다.

그런데 김치냉장고엔 불이 나갔다.>

 

머리를 굴리다 보니 문득 단서가 떠올랐어요.

멀티 콘센트가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받침대 사이에 끼어있어 밥솥에 밥이 떨어지면 누름단추를 눌러 끄곤 했는데 늘 서서 엄지발가락으로 눌러 껐거든요.

그런데 발을 들이밀 때 틈이 좁아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콘센트를 바깥쪽으로 끌어내어 냉장고 앞에 놓아두었는데, 아마도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 그것이 걸리고 냉장고 문 밑부분에 눌려서 불이 꺼진 거라는 추리를 해 냈던 것입니다. 왜냐면 김치 냉장고 누름단추가 제일 바깥쪽 가장자리에 꽂혀 있더군요. 그것도 그제서야 안 것이지만 아무튼 맨 가장자리여서 냉장고 문에 눌릴 확률이 가장 많다는 것입니다. 추리는 정말 그럴듯한 명추리라고 스스로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도 생각해 보니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냥 틈 사이에 짱 박히게 두었더라면 일부러 누르지 않는 이상 그대로 있었을텐데 앞으로 끄집어 내놓은 내 잘못이 컸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여닫을 때 눌려 꺼졌나 하는 것은 오리무중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냉장고는 주로 과일과 쥬스, 우유, 생수 등을  넣어두는 것으로 아들이 자취할 때 쓰다 가져온 작은 것인데, (큰 냉장고는 반대쪽 벽에 있음)음료수를 수시로 마시는 아들이 가장 자주 여닫고, 그 다음은 과일 꺼내려고 여닫는 바로 나입니다.

다른 사람은 가끔 여닫습니다.

자주 여닫는 사람에 의한 실수가 될 확률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실수로 인해서 그랬을까요.

이 문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오리무중....

 

대체 범인이 누구야?

하며 마구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 앉더군요.

범인이 딸이라고 생각했을 때 길길이 뛰던 마음이 오리무중이 되니 그냥 체념으로 이어지더랍니다.

 

에이! 신 김치면 어때! 만두 해먹고 정 뭐하면 사다 먹기도 하면 되고....

신김치도 볶으면 뭐 그냥저냥 먹을만 하잖아!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위로 하면서.....

 

옆에서 남편이 베이스를 넣는 겁니다.

 

"그럼 그럼 까짓거 김치가 좀 시면 어때,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그러면 뭘 해. 사다 먹으면 되지."

 

그런데 뜻밖의 일은 김치를 속에서 끄집어 냈더니 국물도 조금은 있고 무엇보다 남편이 맛있다고 하는 겁니다.

빠른 시간에 익어서 그런가! 하면서, 마냥마냥 김치냉장고에서 익었더라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지금껏 먹어본 김장김치 중에 제일 맛있다나요.

휴우!얼마나 다행인지...

이젠 신김치 때문에 최소한 잔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싶더군요.

김치가 조금만 시어도 잔소리하는 것이 싫어서 더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었던 건 데, 이제 잔소리 들을 일이 없어 다행입니다.

 

사실 내 입맛엔 영 시게 느껴지는데 남편이 좋다니 다행이지요.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몰라서 더 다행입니다.

범인을 모르니 누굴 탓할 일이 없어졌어요.

누구의 실수인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겁니다.

 

미궁 속에 빠진 헤프님은 그렇게 끝났고 우리집은 오늘도 묵은지 같은 김치를 먹으면서도 식탁 분위기는 아주 편안하답니다. 다행이도 김치가 더 이상은 시어지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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