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7 조회수826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7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Mk.3,4)
 
제1독서 히브리서 7,1-3.15-17
 
복음 마르코 3,1-6
 
사실 저는 강론을 하면서 강론 원고를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강론 원고가 아예 없는 것이냐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새벽 묵상 글을 매일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은 강론 원고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더구나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원고를 들고 올라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저는 원고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꼭 강론 원고를 들고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곳에 가서 미사를 할 때였습니다. 제가 깜빡하고서는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어요. 갈등이 생겼습니다. 원고가 없으니, 간단하게라도 메모를 하고서 미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원고 없이 그냥 미사를 할 것인가? 어차피 강론 원고를 보지 않으니 그냥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귀찮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시작했고, 강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미사 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론할 때 한 번도 보지 않는 원고인데, 막상 원고가 없으니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는 것은 물론, 어떻게 말을 진행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군요.

강론 원고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보지 않더라도 들고 강론 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눈에 직접 보이시는 분이 아니지요. 그러다보니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아무런 도움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나에게 어떤 구속감만을 줌으로써 오히려 더 힘들게 하시는 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보이지 않지만, 진실로 나를 지켜주고 힘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강론 원고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있어야 제대로 강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과 함께 해야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은 바로 주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행동이 잘못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너무나도 선한 행동이며, 옳은 행동입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아무런 치유행위를 할 수 없는 안식일에 했다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주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구세주 메시아가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없어도 된다고 대신 그 자리를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나간다면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의 어리석음을 또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로움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느끼도록 합시다.




정성을 다하는 삶의 모습('좋은 글' 중에서)


늙고 있다는 것이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뒤를 돌아보면서 덧없음의 눈물만 흘리거나
남을 원망 하면서 삶에 대한 허무감에 젖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게한 성스러운 존재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구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다.

정직하게 나의 삶을 돌아보면
부끄럼 없이는 떠올리지 못하는 일들이 많고
후회스러운 일들도 많다.

그런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쁘게 살아 있고
나의 미래가 설레임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
완벽하게 기쁘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완벽하게 기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그러나 인생의 큰 흐름이
기쁨과 설레임으로 이루어저 있다면
얼마간의 슬픔이나 우울 따위는
그 흐름 속에 쉽게 녹아
없어진다는 것도 자주 느낀다.

내가 어쩌다 이런 행운과 함께
늙고 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더 늙어서도
더욱 깊은 기쁨과 설렘의 골짜기에
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늙었지만 젊고 나이가 많지만
싱싱한 영혼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깨우는 일에 정성을 바치면서
삶을 끝없이 열어가는 모습이 그립다
 
 
They watched Jesus closely
to see if he would cure him on the sabbath
so that they might accuse him.
(Mk.3,2)
 
당신이 미소짓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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