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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6. 이민식 빈첸시오 할아버지. ~♠†/ 오기선[요셉]신부님 이야기 /원작 차 엘리사벳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0 조회수820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 16. 이민식 빈첸시오 할아버지. ~♠†/ 오기선[요셉]신부님 이야기 /원작 차 엘리사벳.

 

[이민식[빈첸시오]:

[새남터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를 몰래 미리내까지 옮겨 종가산 에서 장사지내드린 분이십니다.]

  

리내 성지에서 대축일 미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들 깨끗한 옷을 단정하게 입고 성당에 모였습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 사상 때문에 남자 교우와 여자 교우 사이에는 휘장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 교우 한 가운데 유달리 백두산처럼 우뚝 솟은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수염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산신령같이 새하얀 저 할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실까?”

요셉은 미사 도중에도 할아버지에게로만 시선이 갔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미리내 성당의 보좌인 박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박 신부님! 백두산 같이 키가 큰 저 할아버지는 누구신가요?”

“아! 저 할아버지는 한국 역사에 영원히 빛나실 분이시지. 저 분이 바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우리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여기까지 어렵게, 어렵게 모시고 오신 할아버지[이민식 빈첸시오]이시다. 연세가 아흔둘이나 되셨는데도 저렇게 건강 하시 단다.”

박 신부님은 빈첸시오 할아버지에게 요셉을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신학교 1학년 오기선 요셉입니다.”

“옳지! 그래야지. 우리 김대건 신부님의 뒤를 이어 훌륭한 신부님이 되어야 해요.”

빈첸시오 할아버지는 요셉의 손을 힘 있게 잡아 주셨습니다.

“자, 우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산소에 참배하러 갑시다.” 하시며 할아버지는 앞장을 서셨습니다.

요셉은 묘소로 가는 동안 빈첸시오 할아버지 옆에 거머리 같이 붙어 다니며 말을 붙였습니다.

“할아버지, 몇 살 때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모셔 오셨나요?”

“그 때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열다섯 살에 호패[지금의 주민등록 증]를 찼고 전쟁터에도 나갈 수 있었단다.

“할아버지 혼자서 그 일을 하셨어요?”

“혼자서 했지. 가족이나 친척들도 감시를 하던 판국인데 누구를 믿을 수 있었겠느냐. 박해 때 범 주교님, 나 신부님, 정 신부님을 비롯하여 교회의 우두머리인 회장들과 교우들 이백여 명이 유다 노릇을 하던 김순성[요한]이 때문에 모두들 잡혀 순교를 당하지 않았더냐.

그리하여 이 땅에 있는 성직자들을 모두 쓸어버린 일은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럼 할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하셨나요?”

“1846년 9월 16일에 우리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시체를 모래로 슬쩍 덮어놓고 나는 낮이나 밤이나 지켜보았단다.

그때는 나도 힘 꽤나 썼지. 난 사십여 일간 근방을 빙빙 돌며 기회를 엿보다가 10월 26일 쯤 경계가 뜸해진 틈을 타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파내어 머리는 가슴에 안고 시신은 둘러업고 야밤에만 미리내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낮에는 산속에 숨어 솔가지로 시신을 덮어놓고 그 옆에서 성모님께 묵주의 기도를 드렸지.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을 미리내까지 무사히 모셔가게 해주십사하고.......남곡리 양지에서 미리내까지 오려면 신덕, 망덕, 애덕이란 세 고개가 있단다.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신, 망, 애 삼덕을 가슴에 기리며 넘나들던 고개지.

나는 망덕 고개를 무사히 넘고 애덕 고개를 넘으려니까 그만 날이 밝아졌다.

신부님의 시신을 산비탈에 있는 콩 밭의 오른쪽 밭고랑에 숨겨놓고 솔가지를 꺾어다가 여러 겹으로 덮어 놓았지. 해가 점점 떠오르자 콩밭 임자가 일꾼들을 데리고 올라와서 가을걷이를 시작하더구나.

나는 소나무 밑에 숨어서 배를 깔고 엎드려 눈만 내놓고 망을 보았지.

그런데 일꾼들이 점점 시신을 숨겨둔 곳 가까이로 다가 오지 않겠니?

나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목숨 대신 드려도 좋으니 우리 착한 목자 김대건 신부님의 장례나 잘 치르게 해달라고 성모님께 정성을 다해 묵주 기도를 수없이 드렸단다.

아! 그런데 일꾼들이 신부님의 시신이 있는 곳에 거의 다 이르자,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동서남북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지 않겠니.

그러자 콩밭 주인은 일꾼들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갔지.

일꾼들이 사라지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날이 개이더구나.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등에 업고 미리내까지 냅다 달려왔단다.

김대건 신부님의 묘를 쓴 산이 우리 종가 산이어서 잘 알고 있었지.

나는 혼자서 시신 묻을 구덩이를 팠단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만 파다가 날이 밝으면 보릿짚으로 덮어 놓았지.

사흘 동안 광중[壙中: 시체를 묻는 구덩이 속]을 파서, 10월 30일 밤에야 시신을 관도 없이 광중에 모셨다.

우리 집에서 널빤지를 가져다가 횡대를 만들어 덮어드렸단다.

그리고 후손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 유해를 찾기 쉽도록 표시를 해 두었지.”

빈첸시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안내해준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는 벌거숭이였습니다.

“할아버지, 왜 묘소에 잔디가 없어요?”

“다 이유가 있단다. 김대건 신부님의 묘를 마련한 뒤 오늘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배를 하러 다니면서 이 묘를 돌보았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김대건 신부님 묘소의 잔디를 달여 먹은 사람들이 백발백중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곳에서 삼십 리 안에 사는 사람들은 교인이건 외부인이건 어디가 아팠다 하면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 봉분의 잔디를 뜯어다 달여서 먹였단다. 그래서 잔디가 자랄 사이도 없이 뜯어 가니까 이렇게 벌거숭이 묘가 되었단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모신 지 55년이 지난 후 교회법에 따라 우리 순교자들을 복자[福者: 종교적으로 공경할 만 하다고 교황청에서 지정 발표한 사람] 품에 올리기 위하여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지. 1901년 5월 24일. 주교님과 신부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묘를 발굴했단다. 나는 그때 증인으로 호출되어 성서를 잡고 맹세를 한 뒤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옮긴 이야기, 묘소를 만든 이야기 등을 고증 하였지.

발굴해 보니 55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단다.

칡넝쿨이 유해를 빙 둘러 감아 주어서 뼈가 하나도 흩어지지 않았단다.

아마도 하느님이 칡넝쿨로 관을 해주셨나 보다.

유해를 창호지로 싸고 번호를 매긴 다음 나무함에 담아서 용산 신학교 제 1 성당 제대 오른 편에 모셨단다.“

 

이민식 할아버지의 말씀은 요셉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17. 일류 구두 수선사 로 이어 집니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성가 287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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