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6 -교훈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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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봉균 | 작성일2007-01-21 | 조회수929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6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첫 째,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처음에는 안절부절 못하고 화를 삭이던 선비들도 얼마 후에는
안정(安靜)을 되찾아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를 지으며
조용히 살게 됩니다. 당쟁(黨爭)의 산물(産物)인 사대부(士大夫)들의 쓰라린 유배생활 감정(感情)을
표출(表出)한 가사(歌辭)를 유배가사(流配歌辭)라 하고 그 외의 모든 글들을 합(合)하여 유배문학
(流配文學)이라고 합니다.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된 조위(曺偉)가
유배지(流配地)인 순천(順天)에서 지은 만분가(萬憤歌)입니다. 작품(作品)의 내용(內容)을 보면 작자
(作者)가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心情)을
임금인 성종(成宗)에게 토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후대(後代)에 지어지는 유배가사의
일종(一種)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크게 영향(影響)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
(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
(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
(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質)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입니다.
둘 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혈연적(血緣的)으로 남이 아니라는
사실(事實)입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海南) 윤(尹)였습니다. 해남 윤씨는 조선(朝鮮)에서 알아주는
명문(名門)의 집안이었습니다. 윤씨의 인물(人物) 중 가장 유명(有名)한 분이 고산(孤山) 윤선도
(尹善道)였고, 그 다음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재는 조선의 삼재
(三齎,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화가(畵家)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고산의 증손(曾孫)이
공재요, 공재의 손녀(孫女)가 다산의 어머니 윤씨였습니다. 그렇다면 고산은 다산의 6대조 외할아버지
가 되는 것입니다.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부(外曾祖父)입니다. 그리 보면 다산의 문재(文才)와 그림솜씨
가 외가 쪽 할아버지들인 고산과 공재의 유전적(遺傳的) 재질(才質)도 절반정도 계승(繼承)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산의 친가(親家)는 어떤 가문일까요. 8대 옥당(玉堂, 홍문관) 집안이자 9대
옥당 집안이라고 자랑하던 집안입니다. 다산의 12대 할아버지인 정자급(丁子伋)이라는 분이 조선왕조
(朝鮮王朝) 초기(初期)에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이후(以後) 5대조 정시윤(丁時潤)에 이르기까지
내리 8대에 이르도록 옥당의 벼슬을 지낸 명문(名門)이라는 뜻입니다. 다산의 고조부(高祖父)의
아우가 옥당벼슬을 지내서 9대 옥당집안이라고도 합니다. 다산 자신(自身)도 홍문관 교리를 지내
옥당벼슬을 하였으니 대단한 가문(家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선조(先祖)
중에 한 사람만 옥당에 들어가도 ‘옥당집’이라는 아름다운 호칭(呼稱)을 얻기 마련인데 연달아
8~9대가 옥당의 벼슬을 지냈다면 대단한 집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 째,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
(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
(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
(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
(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로서 조위(曺偉)와 정철(鄭澈)
의 작품(作品)들과는 차원(次元)을 달리하고 있고, 고산 과 다산의 집안이 조선(朝鮮)의 내노라하는
명문가(名文家)로서 혈연적(血緣的)으로도 연결(連結)되어 있지만, 정말로 하늘에 보화(寶貨)를 쌓고
천상영복(天上榮福)을 누리는 두 가문(家門)의 후손(後孫)들은 따로 계셨으니, 다산 정약용의 친가
(親家)와 외가(外家)의 가계(家系)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정재원은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 첫째 아들 정약현을 낳았고, 정약현의 처남(妻男)이
초기(初期) 천주교(天主敎) 전파(傳播)에 큰 영향(影響)을 끼친 이벽이고, 정학현의 딸이 황사영 백서
를 쓰고 순교한 황사영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고, 정재원은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세 아들과 딸을 두었으니 딸은 조선 최초의 영세자(領洗者)인 이승훈에게 시집을
갔으니 정재원은 이승훈의 장인이고, 둘째 아들 정약전은 다산과 같은 시기(時期)에 흑산도로 유배를
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著述)하였으며, 셋째 아들 정학종은 신유박해(辛酉迫害)때 맏 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殉敎)하였으며, 정학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과 부인 유 세실리아, 딸 정정혜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였으며, 정약용은 넷째 아들로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고산 윤선도의
6대손(六代孫)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종 6촌형인 윤지충은 부모(父母)의 위패(位牌)를 불태웠다하여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조선(朝鮮) 최초(最初)의 순교자(殉敎者)가 되었습니다.
- 끝 -
사랑의 신비여/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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